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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스크랩]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선구자, 겸재 정선(謙齋 鄭敾)의 작품세계

by 휘뚜루50 2018. 7. 8.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선구자, 겸재 정선(謙齋 鄭敾)의 작품세계

- 정선이 본 금감산 금강첩 외 -

 

1. 풍악내산총람(楓岳內山總覽) [풍악내산총람, 간송미술관]


겸재 정선의 절정기 得意作으로 가을의 내금강 전경을 화폭에 압축해 담은 것이다. 풍악은 금강산의 가을 이름이다. 단발령 쪽에서 부감(俯瞰)[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봄]하여 그린 것으로 망원경, 헬리콥터도 없던 시대에 어떻게 이렇게 수백 수천의 봉우리들로

이루어진 내금강의 전모를 세세히 파악하여 한 화폭에 담았는지 겸재의 그림을 그리는 능력에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이 정선의 가슴 속에 차 있어서 마치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듯이 내금강 전역을 환히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렸다.   

 

↑ 금강전도(金剛全圖)  [금강전도, 호암미술관]

 

금강내산을 부감형식의 원형구도로 그린 진경산수이다. 왼편에는 윤택한 토산들을 배치하고, 오른편에는 수직 준법(皴法)

[바위산을 이루어 내는 선묘법]으로 정의된 수많은 첨봉(尖峰)의 바위산을 그려 넣었다.

 

바위산에 보이는 수직준(垂直皴)들은 대개 강하고 활달하며 예리한 데 비해, 토산에 보이는 준법(皴法)과 미점(米點)[남북송

교체기에 문인화가의 대표로 꼽히는 미불(米芾)과 미우인(米友仁) 부자가 남방의 구름 낀 산을 그리는 화법을 창안해 내면서

구름 속에 잠긴 먼 산 봉우리의 울창한 수목을 표현해내기 위해 먹점을 반복하여 찍어나갔는데 이를 사람들이 米氏 일가에서

쓰던 점이라 하여 米點이라 부르게 되었다. 米芾의 점은 크고 둥글어 大米點이라 하고 米友仁의 점은 작고 가늘어 小米點이라

하였다]들은 습윤하고 부드럽다. 부감법으로 일만이천봉을 집결시켜서 그리는 화법은 겸재 이후 크게 유행하였는데, 그것이

겸재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아니면 조본(祖本)이 있었던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고 한다. 

 

 

2. 화적연(禾積淵)  간송미술관

 

위 그림은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정선의 “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에 있는 “화적연”이다. 아직 화적연을 가보지 못했던

이하곤(1677-1724)이란 이는 자신이 본 다른 경치와 겸재의 진경 그림을 비교해 볼 때 어느 것이나 방불하였으므로 이 그림을

통해 화적연의 모습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는 내용의 다음과 같은 제사(題詞) [그림의 감흥을 돋우기 위해 그림에 붙이는 글]를

남겨 겸재의 그림 솜씨를 극찬하고 있다.

 

 “무릇 그림에서 전신(傳神) [실제 모습을 그 정신성까지 그리는 것. 초상화나 진경 사생이 모두 이에 포함된다]은 곧 어려우니

7, 80% 형사(形似) [겉모양을 같게 그림]라도 얻을 수 있다면 이 또한 고수이다. 겸재의 海岳을 그린 여러 그림에서 그 묘한 곳은

거의 傳神에 가깝고 그 평범한 곳이라도 또한 모두 그 形似를 얻었다. 내가 본 것이 이미 이와 같으니, 보지 못한 것일지라도,

스스로 미루어 생각할 만하다. 다른 날 이 그림을 끼고 동쪽으로 가면 거의 화적연에 생소한 사람은 면하게 되리라.”  

 

 

영평(永平) 팔경 중 하나인 화적연은 포천시 관인면 사정리, 상수원 보호구역에 있다. 화적연은 벼낫가리 형상을 한 바위가 솟은

연못으로 '벼낫가리소'라고도 불린다. 수면 위로 10m 높이로 솟은 화강암 바위는 마치 연못 한 가운데 쌓아올린 볏 짚단 같다.

이런 이유로 '화적연(禾積淵)'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화적연 주변에는 현무암으로 된 주상절리가 있어 더욱 아름답다.

 

 

3. 삼부연(三釜淵) "해악전신첩" 간송미술관

 

이 그림은 겸재 만년기의 호방장쾌한 필법이 거침없이 구사된 득의작이라 할 수 있으니 화면 중앙으로 왈칵 솟아오른 거대한

돌기둥 모양의 독립 암봉과 그 맞은편 암벽을 쓸어내린 장쾌무비한 부벽찰법(斧劈擦法) [도끼로 쪼갠 단면처럼 수직으로

보이도록 붓으로 쓸어내려 절벽을 나타내는 먹칠법]이나 그 아래위 봉우리 끝과 시냇가를 따라 울창하게 들어선 소나무숲의

흥건한 먹칠법이 보이는 강렬한 대비와 조화는 겸재 그림 중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특례라 할 수 있다.

 

폭포 아래 너럭바위에 서서 폭포를 바라보는 네 명의 선비와 두 동자는 겸재 일행이었던 모양이고, 소나무숲 속으로 굽이굽이

되돌아 등성이 너머로 나 있는 산길은 바로 삼연이 은거하던 용화촌으로 가는 길인 듯하다. 지금은 턴널이 뚫려 높은 잿마루를

넘지 않아도 된다.

 

실제 폭포 아래에서 보면 폭포 뒤로 용화산의 중첩한 산봉우리들이 겹겹이 보이는데 폭포 위에 있는 평지의 완만한 시냇물을

상징하기 위해서 그 뒷봉우리들을 모두 생략해 놓았다. 바로 이처럼 진경을 그림답게 재구성해 나간 것이 겸재의 畵聖다운

면모이다. 

 

 

4. 화강백전(花江栢田) "海嶽傳神帖" 간송미술관

 

花江은 金化의 다른 이름이니 화강백전은 “금화 잣나무밭”이란 의미이다. 강원도 금화읍 남쪽 2리쯤에 금화 남산인 백수봉(栢樹峰)이 있는데 이 일대에 겸재의 이 화강백전 그림의 對景이 있었다. 이 곳은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워서 그림의 소재가 된 것이라기

보다는 병자호란 때 평안감사 홍명구가 이 곳에서 청군에게 패해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곳이었기 때문에 순국한 장졸 2천명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이 옛 전쟁터를 화폭에 담은 것이다.

 

이런 연유로 다른 진경산수와는 그 구성 자체가 다르다. 마치 서양 풍경화와 같이 시점을 고정시켜 정면에 보이는 잣나무숲을

中景에 가득 채워 놓고 그 아래로 옛 전쟁터를 상징하는 넓은 빈터만 남겨 놓고 있다. 이러한 시각으로 그린 그림이니 자연히

투시적인 원근법이 이루어져 잣나무 잎새들은 먼 곳이 흐려지고 둥치도 멀수록 흐리고 가냘프게 표현되었다.

 

그래서 마치 서양 수채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다만 다른 것은 홍명구의 충혼을 기리는 충렬사 건물이 왼쪽 하단에

반쯤 보인다. 잣나무 잎은 대담한 묵법인 발묵(潑墨)[먹물을 흥건하게 찍어 발라서 번지는 효과로 분위기를 표현하는 먹칠법]과

파묵(破墨)[옅은 농도의 먹칠을 점차 짙은 농도의 먹칠로 파괴해 나감으로써 다양한 농담의 변화로 입체감, 질량감 등의 효과를

내는 먹칠법]으로 淋漓한 먹색을 강조함으로써 밀림의 분위기를 도출하고 있다.

 

잣나무숲이 들어찬 산언덕이 토산인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土坡(흙무더기)를 마치 볏가리처럼 무더기무더기 잣나무 아래에

표현해 놓았다. 그런 토파 처리는 담묵의 피마준(披麻皴)[삼껍질을 째서 널어 놓은 것과 같이 부드러운 필선이 가지런히 중복

되면서 산의 형상을 이루어내는 선묘법. 토산 구릉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된다]과 농묵의 태점(苔點) [이끼를 표현하기

위해 붓을 뉘어 반복해서 찍어낸 큰 먹점]을 조화시켜 유연하게 이루어 나갔다.

 

그러나 산 언덕 아래 뒹굴어 있는 돌무더기들은 옛 전쟁터를 상징하기 위해서인지 제법 모진 소부벽준법(小斧劈皴法)[도끼로

쪼개낸 단면 같은 필선을 구사하여 산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선묘법. 규모가 작은 것을 소부벽, 큰 것을 대부벽이라 한다. 암산

절벽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된다]으로 날카롭게 표현해 놓고 있다. 그 빛깔이 강하지 않아 白石인 듯 보이게 한 것은 땅 위를

뒹굴던 백골을 상징한 것이었던가. 

 

 

삼부연 폭포는 철원군청에서 동쪽으로 약 2.5km 떨어진 명성산 중턱의 조용한 계곡에 있는 높이 20m에 3층으로 된 폭포이다.

사계절 마르지 않는 물과 기이한 바위가 주위 경관과 조화를 이루어 신비로움을 불어 일으키며 폭포의 물 떨어지는 곳이 세군데

있는데 그 모양이 가마솥 같다하여 삼부연이라고 부른다. 이곳에서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어 동네 이름을 용화동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상류 3km 지점에 용화저수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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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수태사동구(水泰寺洞口)  "關東名勝帖" 간송미술관

 

수태사는 강원도 금화군 근북면 건천리에 있는 절로 금화 북쪽 35리 지점에 있다하니 지금은 휴전선 이북에 있어 갈 수 없는 곳이다

이 그림은 보통 겸재가 토산을 그릴 때 쓰는 미가운산법(米家雲山法)[중국 북송 때 미불(米芾)과 미우인(米友仁) 부자는 문인화가로서 항상 구름 속에 잠겨 있는 남중국 산천을 는 표현하는데 알맞은 산수화법을 창안해 내었는데, 산의 중허리 부분을 표현하지 않아 구름에 잠긴 듯 하게하고 산봉우리 위에 드러난 울창한 수림은 米點이라고 불리는 타원형 점들을 거듭 찍어 이를 상징하였다.

 

이를 米氏 일가의 ‘구름산 그리는 법’이라 하여 미가운산법이라 일컫는다]으로만 시종일관되어 있어 골산과 토산을 이상적으로 조화시켜 화면을 구성하던 겸재의 다른 그림들과 크게 구분된다. 아마도 이 산이 기름진 토산으로 삼나무와 전나무 그리고 소나무들이

잡목 숲과 어우러져 빽빽이 들어차서 울창한 데다 겸재가 보았을 때 마침 비구름이 휘감아 푸르름이 뚝뚝 떨어졌던가 보다.

 

얼핏 보아 米家雲山式 산수인듯 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겸재다운 특징이 고루 나타나고 있다. 우선 화면 구성에서 중경에 주봉을

우람하게 높이 솟구쳐 놓고 그에 연이어 두 봉우리를 차이 나게 붙여 놓아 陽數가 중심이 되는 것을 분명히 하고 나서 근경은 두

봉우리만을 낮고 길며 비등하게 늘어놓아 음양대비를 분명히 해놓고 그도 부족해서 三山 二峰 사이에 깊고 긴 계곡을 배치하여

산봉우리들과 대비를 이루도록 해 놓았다. 이것이 바로 주역에 정통하였던 조선 성리학자 겸재가 결코 범연히 지나치지 않던

화면 구성의 원리이다.

 

원경에 담묵으로 遠峯을 설정해 놓은 것도 농담의 대비를 강조하면서 깊이를 더하고자한 묘수인데 중경과 근경의 극단적인 대비를 중화시키기 위해 그 높이는 주봉과 어슷비슷하게 하면서 그보다 더 먼 산 두 봉우리로 뒤를 막아 그 사이를 연결시켜 놓았다.

깊이를 더하고 대비를 중화시키는 절묘한 화면 구성법이다.

 

그러면서 근경 하단 일각을 비워 놓아 주봉 아래를 가린 운무와 함께 산 전체를 구름에 잠긴 듯 환상적인 분위기로 이끌어갔다.

특히 주봉 아래 시냇가로 가득 들어찬 송림의 표현에서 농담의 차이를 내며 담묵으로 둥치와 잎을 엷게 우려 놓은 것은 구름 낀

산의 정취를 남김없이 표현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骨氣가 아주 없어서는 서운했던지 개울 속에 가득 찬 크고 작은

돌덩이들은 한결같이 예리한 부벽준법(斧劈皴法)으로 모나게 쳐놓고 있다.   

 

 

 

6. 정자연(亭子淵)  ‘關東名勝帖’ 간송미술관

 

五里灘 혹은 七里灘이라고 불리어지던 긴 암벽이 일자로 대안에 길게 펼쳐져 있고 시내 이편에는 노송과 잡목 숲에 싸인 초가집

세 채씩이 섶울타리에 둘러쳐져 있다. 대안 절벽은 부벽준법으로 예리하게 쪼개듯 표현하여 깎아지른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한 가지로 사용된 듯한 부벽찰법도 농담의 변화와 운필의 묘용이 자재로워 그 긴 절벽을 이루어가는 데도 지리한 느낌이

없다. 어느 곳에서는 골이 패이고 어느 곳에서는 깎아지르며 어느 곳에는 등나무와 같은 잡수에 걸리고 어느 곳에는 千年矮松이

자라나 있다. 그리고 그 절벽 위에는 역시 노송 잡수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그 사이로 말흘천(末訖川) 시냇물이 여울지며 흘러가니 드넓은 물결에 여울져 일어나는 물결무늬가 완연하다. 정자연 여울목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는 황씨촌 언덕 아래 매어 있는 빈 배 한 척으로 짐작이 가능한데 아마도 나룻배로나 낚싯배로 두루 쓰일

듯하다.

 

 

7. 피금정(披襟亭)  “辛卯年楓嶽圖帖” 국립중앙박물관

 

한양에서 금강산을 가기 위해서는 김화에서 금성을 거쳐 단발령을 넘어야 한다. 금성을 지나며 남대천을 따라 나 있는

대로변에서 피금정과 마주치게 되는데, :옷깃을 풀어 젖히는 정자"라는 뜻에 맞게 여유를 느끼게 하는 경치이다.

 

 

↑ 피금정, “海嶽傳神帖” 간송미술관

 

금화에서 금강산으로 가려면 金城을 거쳐야 하고 창도역에서 동진하여 단발령을 넘어야 한다. 금성을 거치면 성 아래 남대천변을

따라 나 있는 대로변에서 披襟亭과 마주치게 된다. 겸재는 그의 초기 금강산 사생첩이라 할 수 있는 “辛卯年楓嶽圖帖”에 피금정을

매우 건실한 화법과 진솔한 구도로 법도 있게 그려 넣었다.

 

이 그림에서 우리는 겸재가 장차 진경산수화풍을 확립해 놓는 화성으로 대성할 기미를 엿볼 수 있으니 금성의 진산인 慶坡山을

그린 米家雲山式의 남방기법과 남대천변의 가로수 및 피금정을 그린 북방기법이 모두 법도 있게 배운 정법인데 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대립적인 양대 기법을 한 화면에 대담하게 혼용 조화시키는 패기와 기지를 발휘한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겸재는 이 그림을 그린 36년 뒤인 72세 시에 “海嶽傳神帖”을 그리게 되는데 이 피금정을 그 첫 번째 그림으로 삼고 있다. 그 이유는 이 곳이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정문에 해당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기법의 출발이 이 곳으로부터 이루어져나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겸재는 여기에서는 피금정과 그 주변의 가로수도 모두 米家樹法의 남방화법으로 대담하게 일원화시키는 노숙성을 보인다. 구도도

과감한 생략이 이루어지고 위아래에 하늘과 물을 상징하는 공활한 여백을 남김으로써 무궁한 詩情을 유발하고자 하고 있다. 실로 “마음 먹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從心所欲 不踰距)”는 耳順의 경지를 보여주는 그림이 된 것이다. 

 

 

8. 단발령망금강산(斷髮嶺望金剛山)  “海嶽傳神帖”, 간송미술관

 

↑ 단발령망금강산, “辛卯年楓嶽圖帖”, 국립중앙박물관

 

단발령 고개에서 처음 금강산을 대면하는 장면이다. 이곳에 오르는 사람마다 금강산의 풍모를 바라보면 머리를 깎고 속세를

떠나고 싶어진다는 데서 단발령이란 지명이 유래하였다.

 

겸재의 평생지기인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이 겸재가 35세 되던 해에 금강산 초입인 금화에 현감으로 부임하게

되는데 다음해인 辛卯年(1711)에 겸재를 초청해서 금강산을 보게 했는데 이 때 단발령에 올라서 그린 그림이 이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겸재는 신화법을 창안하여 일가를 이루는 계기로 삼는다. 즉 백색 암봉은 북방계의 강한 필묘(筆描)[붓질이 만들어

내는 선으로 그려내는 방법]로, 수림이 우거진 토산은 부드러운 남방계의 부드러운 묵묘(墨描) [붓으로 칠하는 먹칠법으로

그려내는 방법]로 이를 처리하여 극단적인 음양 대비를 보이면서 화면 구성에서는 반드시 肉山(토산)이 骨山(암산)을

포근히 아래에서 감싸는 음양 조화의 성리학적 우주관이 적용되는 신화풍을 창안한 것이다.

 

이는 성리철학을 바탕으로, 이제껏 중국에서는 대립적으로만 발달해온 남북화법을 이상적으로 조화시켜 우리 산천의 표현에

가장 알맞도록 만들어낸 획기적인 신화법이었다.

 

 

9. 금강내산총도(金剛內山總圖)  “海嶽傳神帖”, 간송미술관

 

↑ 금강내산, 고려대학교박물관

 

↑ 정선(鄭敾), 풍악내산총람도(楓岳內山總覽圖) “辛卯年楓嶽圖帖” 조선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마치 하늘에서 새가 되어 금강내산을 내려다 보며 그린 듯 부감하여 그린 그림이다. 이런 전도식의 표현을 정선에 와서 창안된

것이라가 보다는 조선 초 이래로 계속된 보수적인 산수화의 전통과 닿아 있다.

 

 

10. 장안사(長安寺)  "해악팔경" 간송미술관

 

장안사는 내금강 초입에 위치한 사찰로, 금강산을 멀리서 조망하다가 산 속으로 접어들었을 때의 현장감이 화면에 담겨 있다.

무지개다리 모양의 만천교와 왼쪽의 석가봉, 관음봉, 지장봉의 백색 암봉들이 유독 크게 그려졌다.

 

서울에서 금강산을 가자면 의정부와 포천 영평을 지나 강원도로 접어 들어 금화 금성을 거쳐 단발령에 올라 금강산을 바라본 다음

철이현(鐵伊峴)을 넘어 내금강 초입인 長安寺로 들어가게 된다. 장안사는 내금강의 모든 시냇물을 한데 모아 나오는 금강천이 마지막

빠져나오는 水口 안에 자리 잡고 있으므로 북한강의 상류가 되는 이 맑고 큰 시내를 건너야만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이 금강천을

건너는 다리를 언제부터인지 석조 무지개다리[飛虹橋] 형식으로 웅장하고 견고하게 만들어 놓아 그 장려함이 금강산과 필적하였던 모양이다.     

 

飛虹橋가 궁륭형으로 뻥뚤린 굴을 이루면서 전면 중앙을 가로막아 금강천 너른 물을 한데 모아 그 아래로 흘러가게 하자 석가봉,

장경봉 등 백색 암봉들은 마치 금강석으로 만든 기둥인 양 동북쪽에서 힘차게 솟아올라 陰陽 動靜의 철저한 대비를 이루어

놓는다. 겸재 아니고서는 상상도 못할 화면 구성법이다.

 

겸재는 백색 암봉의 표현에 한결같이 모지고 예리한 상악준법(霜鍔皴法)을 적용하고 있는데 골기탱천한 암봉의 당당한 기세를

표현하는데 이보다 더 적합한 描法은 없을 듯하다.

 

한편 소나무와 전나무 등 침엽수림의 표현은 가로로 긴 대담한 먹점을 층층이 쌓아올리고 나무 둥치를 죽죽 그어내리는 소위 미가

편점수법(米家扁點樹法)을 이끌어 써서 울창한 원시림의 그윽한 분위기를 살리고 있으며 먼산 수풀은 米點으로 불리우는 옆으로

긴 대담한 먹점만을 찍어 수림을 상징하고 있는데 이 역시 소나무, 전나무 등 침엽수림이 많은 우리 산천의 수림 양상의 표현에

적절하여 이후 겸재의 토산수림법(土山樹林法)의 한 특징으로 발전해 간다.  

 

↑ 장안사,“辛卯年楓嶽圖帖” 국립중앙박물관

 

이 장안사 그림은 화면 구성상에서나 골산 및 토산 수림의 표현법에서 겸재가 혁신적인 실험을 시도하여 최초로 성공한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골산의 상악준법은 중국의 북방화법에서 취하고 토산수림법은 남방화법에서 위하였으니 중국의 남북방화법의

이상적인 조화가 겸재의 손에 의해서 남김없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11. 백천동(百川洞)  “해악팔경” 간송미술관

 

장안사에서 금강천을 따라 올라가다가 地藏庵 동쪽을 거쳐 백천동에 이르고 보면 암벽이 기이하게 빼어나고 시냇물이 맑고 깨끗

하여 정신이 맑아질 정도라고 한다. 그곳에는 명경대라고 불려지는 큰 암석이 입석 모양으로 서있는데 그 상부에는 수십백 인이

앉을 만하고 그 아래에는 마치 큰 거울을 펼쳐 놓은 것 같은 수천 평 크기의 원형 연못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玉鏡潭으로 물빛이

맑고 푸르러 바닥이 보인다고 하였다.

 

이 연못의 오른쪽으로 가면 신라 망국 후에 그 왕자가 은거하며 쌓아 놓았다는 폐성문이 있고 그 동쪽에는 높은 봉우리가 마치

칼을 세워 놓은 것처럼 날카롭게 솟아 있다고 한다.

 

겸재의 이 “백천동”도는 담헌 이하곤이 위와 같이 기술해 놓은 그 모습을 빠짐없이 모두 표현해 놓고 있다. 중앙에 돌기한 머리 큰

독립 암봉이 명경대인 모양이고 그 동쪽으로 보이는 성문이 마의태자 성문인 듯한데 옥경대만은 짙은 송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화면 가득히 겹겹으로 솟아 있는 암봉들의 긴장된 骨氣가 전면 중앙에 펼쳐진 한 무더기 소나무숲은 임리한 먹빛으로 모두 평형의

조화를 얻고 있다. 문들 성문 위로 하늘 한 자락을 열어 먼 산을 거기 있게 한 것도 답답함을 덜어내는 화면 구성상의 묘리이고

화제와 낙관을 그 위 중앙부에 붙인 것도 겸재다운 배포이다.    

 

 

↑ 명경대(明鏡臺), 심사정, 간송미술관

 

↑ 명경대(明鏡臺), 김홍도, “금강팔경” 간송미술관 

 

 

12. 정양사(正陽寺)   “海嶽八景” 간송미술관

 

松江 鄭澈(1536-1593)은 관동별곡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소향노(小香爐) 대향노 눈 아래 구버보고,

졍양사(正陽寺) 진헐대 고텨 올나 안잔마리,

녀산(廬山) 진면목이 여긔야 다 뵈나다.

어와, 造化翁이 헌사토 헌사할샤.

날거든 뛰디마나 셧거든 솟디마나

芙蓉을 고잣는 듯 백옥을 믓것는 듯,

東溟을 박차는 듯, 北極을 괴웠는 듯,

놉흘시고 望高臺 외로울샤 穴望峰이

하늘의 추미러 므스 일을 사로리라[하늘에 치밀어 올라 무슨 일을 아뢰려고]

쳔만겁(千萬劫) 디나도록 구필 줄 모로난다.

어와 너여이고, 너 가트니 또 잇난가.

 

겸재도 바로 송강이 읊은 시각을 가지고 이 正陽寺를 그려내었다. 放光臺를 주산으로 한 정양사 전경을 부감법으로 그려내려면 정

면 앞 언덕인 진헐대에서 그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임리한 토산 수림으로 둘러싸인 정양사 전경이 근경으로 내려다보이면서

衆香城과 혈망봉으로 이어지는 금상산 일만이천봉의 골기 삼엄한 백색 암봉들이 동쪽 하늘 저 멀리로 또렷이 떠올라 원경을

이루어 놓을 수밖에 없다.

 

陽遠陰近의 천지 이치대로 암산과 토산을 배분하여 화면을 구성해 가면서 다시 근경 처리에 울창한 송림과 밀생한 잡수림이

이루는 그윽한 樹海를 펼쳐 놓은 다음 그 속에 붉은 기둥들이 열립한 웅장한 절 건물들을 대담하게 집중 배치하였다.

거듭 음양 조화의 이치를 강조한 화면 구성법이다.

 

정양사의 왼쪽 돌기둥이 받치고 있는 시원하고 환한 공간을 가진 누각 형식의 문루가 헐성루일 터인데 팔각전은 절 마당 한 가운데 우뚝 솟아 마치 팔각탑 모양으로 위용을 과시한다. 

 

↑ 正陽寺, 간송미술관.

 

↑ 正陽寺, 국립중앙박물관

 

 

13. 만폭동(萬瀑洞)  “해악팔경” 간송미술관

 

내금강 표훈사에서 왼쪽으로 산길을 따라 오르면 정양사가 나오지만, 오른쪽으로 금강천의 큰 물줄기를 따라 가면 만폭동이 나온다 만폭동은 내금강의 상봉인 비로봉 중향성 일대의 물이 기암괴석으로 이어진 암산 계곡을 따라 골골마다 나뉘어 흘러오다가 한데

합수되는 곳이니 왼쪽 정양사 등 넘어 원통암 골짜기 물로부터 중앙의 만회암 물, 보덕굴 물, 오른쪽의 금수대 물, 혈망봉 물 등이

모두 이곳에서 만난다.

 

그런데 이렇게 암산 절벽을 타고 내리떨어지는 만폭의 물길이 한데 합수되는 곳에는 큰 마당보다도 더 넓은 너럭바위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오선봉이라는 독립 암봉이 솟아 너럭바위를 가려줌으로써 너럭바위를 더 없는 명당으로 만들어 준다.

 

이렇듯 만폭동이 금강산 절경 중의 절경이니 겸재는 많은 수의 만폭동 도를 남겨 놓고 있는데 한결같이 너럭바위를 근경으로 잡은

다음 대소 향로봉과 좌선암봉을 좌우로 배치하여 중경을 삼고 그 너머로 중향성의 골봉들을 삼엄하게 나열시키는 화면 구성법을

쓰고 있다.

 

이런 구도는 정양사에서 보이던 토석의 구분에 따른 강렬한 음양 대비법에 비교해 본다면 그 원칙에서 벗어난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하지만 이곳에서도 원칙적으로 음양 조화를 화면 구성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다만 對境이 전반적으로 골기늠름한 암봉으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 사생성을 무시할 수 없어 극단적인 대비를 삼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너럭바위를 둥글게 표현하여 합수된 만폭동의 물줄기가 그를 에워싸 휘돌게 하면서 그 뒤 가운데로 五人峰을 과시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런 강경한 표현이 화면을 경직시킬 우려가 있으므로 그 좌우로는 울창한 송림을 배치하여 짐짓 굳셈과

부드러움의 조화를 얻게 한 다음 오른쪽 근경에도 송림을 더하여 더욱 그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있다.

 

한편 중경인 대소 향로봉과 좌선암봉은 암산임에도 불구하고 송림을 층층이 배열하여 스스로 조화를 얻게 하면서 원경 골봉에

대응하도록 하였는데, 대향로봉 뒤로는 사자암을 마치 구름 무늬 형식으로 표현하고 좌선암봉 위에는 좌선암에 인간적 형상성을

부여함으로써 더욱 암산의 골기를 중화시켜 놓는다. 

 

이 만폭동을 송강은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영듕(營中)이 무사하고 시졀(時節)이 삼월인 제,

화쳔(花川) 시내길히 楓岳으로 버더 잇다.

行裝을 다 떨티고 셕경(石逕)의 막대 디퍼

백쳔동(百川洞) 겨테 두고 만폭동 드러가니,

銀가튼 무지게 玉가튼 룡(龍)의 초리

섯돌며 뿜는 소리 십리예 자자시니,

들을 제는 우레러니 보니난 눈이로다.

 

↑ 만폭동, “해악전신첩” 간송미술관

 

 

↑ 만폭동, 서울대학교박물관

 

↑ 만폭동, 심사정, 간송미술관

 

 

14. 보덕굴(普德窟) , “신묘년풍악도첩” 국립중앙박물관

 

표훈사에서 금강대와 만폭동을 거슬러 올라가면 벽하담이 흐르고 그 오른쪽 높은 언덕에 보덕굴이 있다.

 

왼쪽으로는 대소 향로봉이 위치하여 보덕굴과 병립을 이룬다. 

表訓寺에서 금강대와 만폭동을 거쳐 계속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壁霞潭이 나오게 되는데 이 벽하담의 왼쪽에는 대소 향로봉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법기봉이 우뚝 솟아 앞을 가로막는다. 이 전경을 부감하여 한 화폭에 압축시켜 놓은 것이 “보덕굴”도이다.

 

금강대 일대를 前景으로 하고 대소 두 향로봉과 법기봉을 中景으로 삼아 화면의 주축을 이룬 다음 衆香城을 遠山 처리하여 원경

으로 삼은 욕심 사나운 화면 구성법을 보인 그림이다. 아직 36세 밖에 안 된 혈기방장한 나이로 꿈 속에서나 그리던 금강산을

초대면하고 그 황홀한 아름다움에 넋을 빼앗겨 있던 당시 겸재의 상황을 짐작한다면 능히 이런 과욕을 이해해 줄 수 있다.

 

겸재는 여기서 또 한 가지 실수를 하고 있다. 金剛川 긴 물줄기를 하나도 빼어 놓지 않고 모두 표현해 보려고 화면의 중앙에 이를

굽이굽이 모두 다 그려 놓았다. 그런데 벽하담을 중심으로 아래위로 이어진 이 물줄기는 조금도 長遠幽深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郭熙가 “林泉高致” 중 “山水訓”에서

 

“물이 멀고자 하는데 곧 그것을 다 나타내면 멀지 않고, 가리고 드러남이 그 물결을 끊어 놓으면 멀어진다. 물을 다 나타내면

서리고 꺾여서 생기는 먼 느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지렁이를 그려 놓은 것과 무엇이 다르리오.” 라고 한 화법의 기초 지식을

아직 터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겸재는 이런 치기어린 실수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으로 고금의 감상안을 충분히 감동시키고 있다.

진지한 사생 노력과 음양조화의 성리학적 우주관이 극명하게 표출되어 보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기 때문이다.

 

대소 향로봉이 붓끝 모양의 삼각봉 형태로 왼쪽에 중첩 표현되니 이는 西方金山을 상징하는 표현이고 그 맞은편에 절벽을 이루는

법기봉의 머리 큰 암벽 형태는 東方木山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 자체가 음양 조화를 보이는 것인데 향로봉은 土山으로 법기봉은

岩山으로 철저하게 일관시켜 더욱 음양 대비를 강조해 놓고 있다.

 

그 산세 자체가 그런 특징도 있었겠지만 겸재의 畵眼이 더욱 그 특징을 조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소 향로봉 사이에 獅子岩峯

의 기암괴석 표현이 의도적으로 위축되고 있는 것에서 더욱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겸재가 畵聖이 될 수 있는 천부의 재질이 바로

여기에 있다.

 

對境에 의도적인 회화성을 마음대로 부여하여 그 정신성을 강조하는 이른 바 傳神技法으로 산천의 아름다움을 사생해 내고, 이를

통해 자연미를 회화미로 재창조해내고 있다. 이는 당시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던 眞景詩와 표리를 이루는 회화기법이

었으니 겸재의 이런 그림을 眞景山水畵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보덕굴, 심사정, 간송미술관

 

 

15. 비로봉(毘盧峰)  “겸재화” 개인소장

 

비로봉은 금강산의 주봉이다. 해발 1,638미터의 높은 봉우리인데 이 봉우리를 정점으로 하여 이른 바 금강산 일만이천봉이 사방

으로 벋어내려 內金剛, 外金剛, 海金剛, 新金剛의 4금강을 이룬다. 명산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겠지만

그 첫째가 주봉의 존재가 뚜렷하고 빼어나야 한다는 조건일 것이다.

 

그래야만 산형이 완비되어 빈틈없는 조화를 이루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로봉은 이런 그림 같은 산의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으니 금강산이 명산이 되는 연유는 이 비로봉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보다.

 

그래서 송강은 “관동별곡”에서 비로봉을 다음과 같이 읊어 그 높고 빼어남을 찬탄한다.

 

毘盧峰 샹샹두(上上頭)의 올라 보니 긔 뉘신고.

東山 泰山이 어느야 놉돗던고[공자는 동산에 올라 노나라가 작고, 태산에 올라서 천하를 작다고 했으니,

동산 태산 중 어느 것이 높던가.

 

魯國 조븐 줄도 우리는 모라거든,

넙거나 넙은 텬하(天下) 엇띠하여 격단 말고[작다고 했는가].

어와 뎌 디위를 어이하면 알거이고.

 

겸재의 이 “비로봉”도는 그 장대한 위용이 마치 하늘을 찌를 듯 소용돌이쳐 치솟고 있다. 칼날 같은 중향성의 백색 암봉들은 상악

준법(霜鍔皴法)으로 예리하게 날을 세워 전면에 열립시키고, 그 뒤 화면 전체에 비로봉을 과감하게 채워넣는 대담무쌍한 화면

구성법인데 이처럼 장쾌한 배치와 구성은 회화사상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强柔를

자재롭게 구사한 필법의 묘용에 이르면 사람의 능력 밖에서 이루어진 듯 다만 황홀할 뿐이다.

 

삼치마를 헤쳐 놓은 듯한 피마준(披麻皴)과 구름 같은 운두준(雲頭皴)[뭉게뭉게 일어나는 구름 머리 모양의 둥근 필선을 중복시켜

산봉우리나 바위 형상을 표현해내는 선묘법]을 혼용하여 묵직하게 용솟음치며 하늘로 치받쳐 오르는 듯 유연 장중하게 표현한

비로봉의 필법과 상악준법이 보여 주는 중향성의 예각 수직 준법은 그야말로 강유의 극단적 대비라 할 수 있다.

이런 극단적 대비가 보여 주는 조화 속에서 우리는 회화미의 극치를 실감하게 된다.  

 

↑ 혈망봉(穴望峰)  “謙齋畵” 개인소장

 

혈망봉은 내금강과 외금강을 나누는 내수점(內水岾) 바로 서쪽에 가장 높이 솟아 있는 봉우리이다.

즉 내금강의 동쪽 경계를 이루는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송강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놉흘시고 望高臺 외로울샤 穴望峰이

하늘의 추미러 므스 일을 사로리라[하늘에 치밀어 올라 무슨 일을 아뢰려고

쳔만겁(千萬劫) 디나도록 구필 줄 모로난다.

어와 너여이고, 너 가트니 또 잇난가.

 

그래서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샅샅이 알아 내금강 전체를 한 화폭에 담아낼 수 있었던 겸재는 바로 그 내금강 전도인 “풍악내산

총람”도에서 혈망봉을 동쪽의 가장 높은 봉우리로 분명히 표현해 놓고 있다. 그 그림에서 높은 암봉에 분명히 큰 구멍이 맞뚫려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바로 그 때문에 혈망봉이란 이름을 얻었다 한다.

 

겸재는 72세 되던 해인 영조 23년(1747), 단 하나였던 아우가 66세로 먼저 세상을 떠나는 일을 당하게 된다. 이에 58년 전 자신이

14세이고 아우가 8세 나던 해 부친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아우를 양자 보냈던 뼈아픈 과거를 연상하게 된다. 그래서 홀연히

그 해 봄 슬픔을 떨쳐버리려는 듯 금강산 여행을 감행한다.

 

그때 그 寫生草本이라고 생각되는 그림 중 8폭이 중국 故事圖 8폭과 함께 “겸재화”라는 제목의 화첩으로 꾸며져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혈망도가 그 중 하나이다. 이 8폭의 그림을 사생초본이라고 보는 것은 그 때에 초본을 바탕으로 다시 차분하게 그려

내었을 정본인 “해악전신첩”이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혈망도만은 거기에서 빠져 있다. 사생초본이라서 水墨으로만 일관했는데 畵興을 주체할 수 없었던 듯 속필로 속성해낸

느낌이 완연하다. 그러나 이 시기 겸재는 畵圖修鍊이 입신의 경지에 들어 있어 그야말로 붓만 대면 즉석에서 神品이 출현하는

상황이었다. 겸재 특유의 상악준법을 사정없이 중첩시켜 혈망봉을 주봉으로 우뚝 솟구쳐 놓고 그 왼편에 망고대를 종산으로

배열하였다.

 

오른쪽은 안문재[內水岾]로 넘어가는 낮은 언덕을 상징하기 위해 산자락을 완만하게 끌면서 짙은 송림으로 가려 놓고 그 밖으로

는 중향성 중 다른 봉우리들을 조금 흐린 먹으로 그려내어 遠山을 삼았는데 이런 표현이 오히려 혈망봉을 더욱 높게 보이게 한다.

 

↑ 혈망봉, 서울대학교박물관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혈망봉”도는 위의 사생초본을 바탕으로 하여 天一臺쯤에서 바라본 시각으로 그린 것으로 보아야 하니

隱寂庵인 듯한 암자가 그 아래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악준으로 이루어낸 혈망봉 骨峯만 화면에 가득 채워 놓고는 짐짓

산자락을 열어 小洞府를 만들고 짙은 수림에 쌓인 암자 한 채를 표현해 놓은 것이다.

 

이 역시 음양 조화를 강하게 의식한 화면 구성인데 그것만으로는 列立한 골봉의 기세를 감당하기 어렵다 생각하였던지 청묵흔

(靑墨痕)[푸른 먹물을 옅게 타서 붓칠 흔적만 남기는 우림법]으로 봉우리마다 상봉 이하를 훈염(暈染)[해무리나 달무리 지듯

물에 먹이나 채색을 약간 섞어 우려내는 설채법. 주로 안개나 달빛 등 은은한 분위기 표현에 사용되는 기법]하여 푸른 안개에

휩싸인 듯한 느낌을 자아내게 하였다. 맨 아래는 짙은 운무를 상징하도록 바탕색을 수윤(水潤)[붓으로 물칠만 하는 우림법]

하기망 한 채로 그대로 두고 있다.

 

 

17. 불정대(佛頂臺)  “해악전신첩” 간송미술관

 

내금강에서 외금강으로 넘어가려면 안문재[雁門岾]을 넘어야 하는데 이미 정송강은 400여년 전에 이 재를 넘어서 외금강의

명승인 불정대를 탐방하고 있다.

 

磨河衍 妙吉祥 雁門 재 너머디여,

외나모 써근 다리 블뎡대(佛頂臺) 올라하니,

千尋絶壁을 半空애 셰여 두고[세워 두고],

은하슈 한 구비를 촌촌히 버혀내여[마디마디 잘라내어],

실가티 플텨이셔 뵈가티 거러시니[실처럼 풀어서 베처럼 걸었으니]

圖徑 열 두 구비, 내 보매난 여러히라.

니뎍션(李謫仙) 이제 이셔 고텨 의논하게 되면,

[이백이 ‘망여산 폭포’에서 여산폭포를 극찬했는데],

녀산(廬山)이 여긔도곤 낫단 말 못하려니.

 

정송강보다 140년 뒤에 나서 금강산 진경을 글이 아닌 그림으로 묘사해낸 정겸재는 송강가사의 진경 묘사력에 감복하였던 듯 그

내용에 영락없이 부합하도록 “불정대”를 그리고 있다. 불정대는 박달봉 본산으로부터 외나무다리를 건너서야 비로소 올라갈 수

있는데 그 위에는 수십명이 함께 앉을 만한 넓고 편안한 공간이 있으며 그곳에서 서쪽을 보면 十二瀑이 맞바라다 보이고 동쪽

으로 굽어보면 동해바다가 발밑에 깔린다고 한다.

 

불정대와 박달봉은 대부벽준(大斧劈皴)에 절대준(折帶皴)[시루떡을 썰어 떡판에 고여 놓은 듯한 모양으로 바위 단면을 켜켜로

쌓아 올린 듯 표현하여 암벽을 이루어내는 선묘법]을 가미한 대담한 필묵법으로 호방하게 묘사하여 임리한 미가수법(米家樹法)

과 어우러져 웅혼한 기상을 표출시킨데 반해 구정봉 암벽은 소부벽준(小斧劈皴)에 피마준(披麻皴)을 연결시킨 장부벽준(長斧劈皴)[부벽준을 길게 쳐내린 선묘법. 금강산처럼 드높은 수직 골봉 표현에 주로 쓰이임] 형태의 겸재준을 난만하게 구사하여 장쾌한

기상이 하늘을 찌르게 하였다.

 

↑불정대, “신묘년풍악도첩” 국립중앙박물관 

 

18. 구룡연(九龍淵)  “겸재화” 개인소장

 

외금강 쪽으로부터 금강산을 본다면 점입가경이겠지만 내금강 쪽으로부터 들어가게 되면 첫 대면에서 숨막히는 충격으로 감관이

마비되어 외금강 쪽은 안중에도 없게 된다. 역대 시문이나 그림에서 내금강을 소재로 한 것이 많고 외금강 쪽을 소홀히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체로 서울에서 금강산에 가려면 단발령을 넘어 바로 내금강으로 가기 때문이다.

 

정송강도 그런 노정을 잡았고 겸재도 그 길을 따라 갔다.

겸재의 금강산 그림이 대부분 내금강을 소재로 택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구룡연만은 비록 그것이 외금강에 있다하더라도 그 경관이 빼어나 겸재도 가끔 화폭에 올리고 있는데 이 그림은 겸재가 72세

되던 영조 23년(1747)에 금강산을 다시 여행하면서 사생해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 구룡연도는 필법이 웅혼장쾌하고

묵법이 거침 없이 넓고 크며 씻은 듯이 맑고 깨끗한데다 구도가 간결명료하다.

 

여기에는 겸재가 70 이후의 노경에 보이던 완숙한 사생 기량이 그대로 표출되어 있다.

속필로 대담하게 처리하면서도 구룡연이 가지는 절경으로의 특징을 능숙하게 잡아내어 회화미로 승화시켜 놓고 있다.

 

↑ 구룡연, 김홍도 “금강팔경” 간송미술관 

 

 

19. 백천교(百川橋)  “신묘년풍악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에 금강산 탐승객들은 대체로 장안사 만천교를 통해 내금강으로 들어와 백천교를 통해 외금강으로 나가는 노정을 택하

였다. 오른쪽에 내금강 여정 때 타고 다녔을 남여 네 채와 이를 매고 다녔을 승려들이 보이고 건너편 외금강 쪽으로는 말 4필이

대기하고 있다.

 

금강산의 내금강 물은 장안사 앞 萬川橋[비홍교] 밑으로 모아 흐르고, 외금강 물은 외원통암 아래 百川橋 밑으로 모여 나간다.

그러니 만천교와 백천교는 금강산으로 들고 나는 출입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대체로 내금강으로 들어와 외금강으로

나가던 조선시대 금강산 탐승객들은 만천교로 들어와 백천교로 나가는 코스를 상식으로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상식에 따라 만천교에서는 入山의 황홀한 감동을 묘사해내고 백천교에서는 出山의 아쉬움을 그려낸다.

 

이 그림은 겸재가 진경화법 창안을 위하여 그가 익혀온 전통적인 중국 남북방 화법의 묘리를 대담하게 조화시켜 자기화에 성공한

대표적인 예 중의 하나이다. 울창한 전나무숲으로 둘러싸인 백천교 주변 경관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화면 사방에 전나무 숲을

가득 포진시켜 놓았는데 원경인 상단을 더욱 빽빽한 밀림 형태로 운무에 가린 듯 흐려져 나갔다.

 

울창임리한 米家樹法으로 潑墨과 破墨의 묵묘를 유감없이 발휘하였으니 이 전나무의 樹法만은 남방화법의 묘리로만 표현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大斧劈皴을 과감하게 도입하여 암벽을 처리하려 한 것은 북방화법의 묘리이니 여기서 남북화법의 이상적인

조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여울져 흐르는 남대천 물이 석벽 사이를 뚫고 굽이치며 흘러 화면을 중앙에서 양분시키므로 此岸과 彼岸을 나누어 出山의 경계를

분명히 했다. 중앙에 섬처럼 솟아 있는 너럭바위에 올라앉아 담소하는 두 선비는 出山의 아쉬움으로 내를 건너기를 고의로

지연시키는 듯한 인상이고 내 건너 말들을 등대시키고 있는 마부 일행은 마중 준비에 부산한 듯하다.

 

냇가 바위 위에서 내 건너 마부들에게 무엇인가 지시하고 있는 이는 이 여행을 주도하는 책무를 맡은 사람인 듯한데 그 곁으로

가마 두 채가 놓여 있고 그것을 메고 왔으리라 생각되는 승려 8, 9인이 보인다.

 

이 시기 고관대작이나 명문 귀인이 금강산을 여행하게 되면 이들은 장안사에서부터 승려들이 메는 가마를 타고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이런 관습은 봉래 양사언이 회양부사를 지내던 선조 초년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인데 이후 성습이 되어 조선조

말까지 지속되었다.

 

 

20. 해산정(海山亭)  “해악전신첩” 간송미술관 .

 

백천교를 건너 외금강을 벗어나서 남강 줄기를 따라 10여리를 동진하면 高城邑이 나오고 다시 10리쯤 더 가면 동해바다와 만난다

그러니 고성은 금강산과 동해를 좌우 지척에 끼고 있는 천하제일의 명읍이 될 수밖에 없다.

 

남강은 남쪽 성 밑을 감돌아 흘러가고 금강산 일만이천봉이 서쪽에 병풍처럼 둘러 있으며 동쪽으로는 동해의 푸른 물결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이런 곳에 어찌 명산 대해를 감상할 만한 정자 한 채가 없을 수 있겠는가. 조망이 좋은 관아 서쪽 언덕 위에 정자 한

채가 서있으니 海山亭이 그것이다.

 

서구암(西龜岩) 아래에 드높이 자리잡은 해산정 큰 건물 아래에는 객사 건물이 즐비하고 그 앞으로는 민가들이 초봄의 연초록빛

숲 속에 군데군데 무리지어 마을을 이루고 있다. 남강가에는 帶湖亭이 2층 누각 형태로 송림 속에 싸여 있으며 마을 끝에는 누문

없는 성문이 보인다. 이것이 해산정을 둘러싼 고성읍의 전경으로 바로 이 그림의 주축을 이루는 중경에 해당한다.

 

원경으로는 금강산 백색 암봉들이 담묵의 상악준법으로 아련하게 표현되어 삼엄한 기세를 과시하였고 남강 건너편에는

절벽을 이룬 적벽과 그 배후의 토산이 과감한 필법을 보임으로써 몽롱한 분위기의 고성 읍내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근경은 객사 아래의 동구암과 남강 입구 동해에 잠겨 있는 칠성암으로 연결되는 북동쪽 경치인데 모두 임리한 묵법으로 처리한

미가송법(米家松法)[미불 일가 특유의 소나무 그림법. 발묵과 파묵법을 함께 구사하여 짙고 옅은 먹점으로 소나무의 잎과 가지를

상징하고 한 붓으로 쳐낸 짙고 굵은 먹선으로 둥치를 그려내는 기법]의 송림이 그 주변을 장식하여 원경의 삼엄한 骨峯들과

신묘한 대비를 이루어 놓고 있다.

 

 

↑ 해산정, “신묘년풍악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외금강을 벗어나 동해안에 위치한 고성의 해산정 모습이다.

금강산 백색 암봉을 원경에 두고 오른쪽에는 적벽과 남강, 대호정, 근경의 동해에는 북두칠성의 배열을 한 칠성봉을 그렸다.

 

 

21. 칠성암(七星巖)  "해악전신첩" 간송미술관

 

칠성암은 고성읍 동쪽 십리 지점인 남강 하구 동해 바다 속에 있는 일곱 개의 바위섬이다. 겸재의 이 칠성암 그림은 농담을 달리

하는 권운준(卷雲皴)[새털구름처럼 둥글둥글 말리는 듯한 필선을 중복시켜 바위나 산을 표현해내는 선묘법. 침식된 해안 바위

등을 표현하는 데 주로 쓰인다] 계통의 대담한 필선을 분방하게 구사하여 혹은 서기도 하고 혹은 쭈그려 앉기도 하며 또는

의자에 앉기도 하는 등 각양각색으로 인물의 자태를 표현해 놓았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그 본질을 정확하게 추출해내어 감필

(減筆) [사물의 형태와 본질을 정확히 파악한 다음 극도로 생략된 실선으로 그 형질을 함축 표현하는 추상화법. 禪宗의 발전

으로 唐말 五代경부터 발전해온 그림 기법이다]의 묘로 추상화시킬 수 있었는지 감탄스러울 뿐이다. 더구나 성긴 대빗자루로

대강대강 쓸어간 듯한 물결 표현에서 일렁이는 동해바다의 높고 큰 파도를 실감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22. 해금강  "겸재화" 개인소장

 

칠성암에서 동해바다로 배를 더 저어나가 뱃머리를 북쪽으로 돌려나가면 무수한 백색 화강암봉들이 해면에 떠올라 기기묘묘한

형상을 짓고 있는 해금강에 이르게 된다. 이 해금강 그림은 “겸재화”라는 화첩에 들어 있는데 이 화첩은 겸재 72세 시에 그렸던

금강산 사생첩의 일부이다. 그래서 이 그림도 겸재화법이 원숙한 경지에 이른 시기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다.

 

상악준법을 자기화하여 정말 서릿발인 듯 혹은 수정돌인 듯 끝이 예리하게 모진 무수한 岩柱를 겹겹이 밀집시켜 성처럼 둘러치고

그 안에 일렁이는 물결을 채워 놓았는데 그 물결 표현이 또한 겸재 독창의 겸재 파도법이다. 남송 馬遠의 “수도권(水圖卷)”에서

보인 층파첩랑식(層波疊浪式)[층을 이루며 쌓이는 물결]의 主從線을 갖춘 도식적인 파문이 아니라 농담을 같이하는 동질의

담묵선을 길고 짧게 중첩 구사하여 자유자재로 파랑을 일으켜 놓고 있는 것이다.

 

이에 전체적인 질서 속에서 파도는 더욱 흉용해 보이는데 이는 水光의 반사를 염두에 두고 높낮이에 따라 농담의 차등을 둔 탓이다.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배를 저어나갔던 듯 근경의 암봉들 아랫자락 역시 해그림자로 흐려 있다. 앞산이 짙고 먼산이 흐리며 아래가 어둡고 위가 밝으며 앞면보다는 뒷면이 밝은 탓도 그에 있다. 이런 세심한 관찰과 표현이 바로 겸재를 진경화풍의 대성자요 畵聖으로 떠받들게 한 근본 요인이다.

 

↑ 臨摹檀園(임모단원)海金剛前面, 장지성 개인소장

 

 

23. 삼일포(三日浦)  "해악팔경" 간송미술관

 

삼일포는 고성 북방 5리 지점에 있는 천연 호수이다. 외금강 神溪寺 골짜기로부터 동류하여 흘러오는 신계천은 고성 서북쪽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흘러가려다 법기봉 36봉의 연봉에 가로막혀 더 나아가지 못하고 이를 비켜둔 채 다시 동류를 계속하여

고성 서쪽 가까운 지점에서 남강에 합류한다. 이 결과 북류하던 물줄기가 막히어 만들어진 호수가 바로 삼일포이다.

 

호수 주위가 10여 리 남짓하고 주변으로는 금강산으로부터 흘러내린 백색 화강암봉들이 온갖 형상을 지우면서 에워싸 주는데 그

숫자가 36봉으로 헤아려질 만큼 많다. 36봉이 각양각색으로 그 산자락들을 호수 속에 밀어 넣어 크고 작은 바위섬들을 간간

호면 위로 떠올리다가 호수 중앙에 이르러서는 그 힘을 한데 모아 솟구쳐낸 듯 큰 바위섬 하나를 만들어 놓는다

 

이 섬이 바로 四仙島이니 신라 때 화랑인 永郞, 述郞, 安祥, 南石行이 이곳에 왔다가 그 경치에 홀려 3일 동안 돌아가는 것도

잊고 놀았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삼일포란 이름도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삼일포’도는 전체적으로 평원법(平遠法)[동양화에서는 三遠法을 설정하는데 아래에서 높은 봉우리를 쳐다볼 때 생기는 원근

감을 高遠이라 하고 높은 곳에서 아래로 볼 때 생기는 원근감을 深遠이라 하며 수평적인 시각으로 사방을 둘러볼 때 생기는 원근

감을 平遠이라 한다. 평원법은 평원광야를 그릴 때 적용된다]에 해당하는 視感으로 對境을 파악하여 법기봉을 멀리 흐려 놓은

다음 사선정을 중심으로 한 호수의 주변을 강렬하게 표현함으로써 평원광활한 의취를 크게 고양하고 있다.  

 

↑ 삼일호, “신묘년풍악도첩” 국립중앙박물관  

 

↑ 삼일포, 심사정 간송미술관 

 

 

24. 문암관일출(門岩觀日出) “해악전신첩” 간송미술관

 

앞의 사선정도에서 오른쪽 위에 작게 그려졌던 문암의 모습을 확대하여 그린 것이다. 오른쪽 아래에 사선정의 모습도 작게 등장한다 돌로 만든 문처럼 생겼다하여 문암이라 하는데, 두 개의 돌이 깍여 자른 듯 서있고 그 위에 너럭바위가 덮여 있다.

 

“신묘년풍악도첩” 속에 들어 있는 아래 그림은 문암을 지나 그 위에 있는 바위 위에서 동해 일출을 바라보는 정경을 사생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문암봉(북고봉) 아래 삼일호 속에 사자암과 사선정을 표현하고 낮게 드리워진 36봉 연봉의 봉우리들을 해상

일출의 중간에 있는 대로 배치시킨 것이다. 이로 인하여 화면 구성이 산만하게 되고 시계가 옹색스럽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72세 시의 사생도라 할 수 있는 세 번째 그림인 “겸재화”라는 화첩 속에서의 “고성문암”도에 이르면 화법을 일신하여 구도

에서 사선정과 사자암을 생략하고 중간의 중첩한 산줄기도 송림 우거진 湖岸 小丘로 변형시켜 화면을 긴축하고 시야를 운치 있게

넓혀 놓는다.

 

뿐만아니라 문암봉을 송림에 싸인 토산인 양 겸재 특유의 米家土山松林法으로 처리하고 그 가운데에 마치 큰 감자 셋으로 문을

세워 놓은 듯 석문을 의도적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그러자니 상대적으로 그 문암 앞의 높은 바위도 반석으로 낮게 가라앉혀

그곳에서 편안하고 점잖게 일출을 즐길 수 있도록 변형시켜 놓았다.

 

그런데 이 사생도를 보다 더 정제한 맨 위의 “해악전신첩”의 “문암관일출”도에 이르면 중경의 송림 小丘가 다시 단순 희미한 토파

로 생략되어 일출을 바라보는 시계는 막힘 없이 광활하게 트이게 되고 문암의 돌올한 기세는 더욱 고양되어 신선한 새벽 일출의

기상이 화면에 넘쳐 흐르게 된다.

 

중경의 지나친 공허감을 메우기 위해 사자암을 의도적으로 삼일호 중앙에 띄워 놓고 법기봉의 인형석도 그 모습을 찾아 주어

문암의 웅건한 자세와 조화를 이루게 하고 있다.

 

↑ 고성문암관일출, “신묘년풍악도첩” 국립중앙박물관

 

↑ 고성문암, “겸재화” 개인소장

 

 

↑ 옹천(瓮遷)  “신묘년풍악도첩” 국립중앙박물관

 

문암에서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가면 옹천 즉 독벼랑이라 불리는 둥그런 형태의 벼랑이 나온다. 파도가 계속 넘실거리고 말이

쌍으로 다니지 못할 정도로 좁고 험준한 절벽이다. 중턱으로 난 길에 점을 게속 직어 행로는 나타낸 점이 재미있다.

 

겸재는 옹천, 즉 독벼랑을 정말 독의 윗부분처럼 둥그스름하게 화폭 왼쪽 반 면에 채워 놓고 오른쪽 반 너머로는

다만 흉용한 파도가 일렁이는 동해바다를 펼쳐 놓는 대담한 화면 구성을 시도하고 있다.

 

옹천의 벼랑바위는 쇄찰법(刷擦法)[붓을 뉘어 쓸어내리는 먹칠법. 주로 벼랑바위의 매끄러운 표면이나 수직 단면 등의 표현에

사용된다]으로 붓을 뉘어 대담하게 쓸어내림으로써 바윗덩어리를 상징하고 바다는 파랑층첩식(波浪層疊式)[물결을 겹겹이

포개 놓음]으로 붓을 세워 물결을 중첩시키는 것으로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한 가닥 실낱 같은 소로가 굽이굽이 하얗게 옹천의 중허리를 감돌아나가게 함으로써 위태로운 길의 실상을 드러나게 하였다. 참고로 훗날 단원 김홍도가 이 옹천을 그 자신의 화법대로 그린 그림을 보면 위기감 같은 것을 느끼기에는 좀 미흡한 감이 없지 않다.

 

↑ 옹천, “겸재화” 개인소장 

 

↑ 옹천, 김홍도 “금강팔경” 간송미술관

 

 

↑ 천불암(千佛岩) “관동명승첩” 간송미술관

이 천불암이 어디에 있는지 지도와 地誌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고 한다. 겸재는 다만 천불암이란 화제로, 관동팔경 외에 금화 “수태

사동구”와 평강 “정자연”을 합쳐 관동 명승 십일경을 그린 “관동명승첩” 속에 그려 넣고 있다. 마치 무릉도원이나 청학동처럼

실재하지 않는 이상경으로 고성과 통천 사이 어느 곳에 있다고 믿어지는 곳인가..?

 

어떻든 이 “천불암”도는 바다 속에 기기묘묘한 백색 화강암주가 무수히 열립해 있는 것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런데 이

괴석군을 자세히 살펴보면 온통 각양각색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스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합장하기도 하고 배례

하기도 하며 북을 치기도 하고 목탁을 두드리기도 하는 등 승려의 백천 가지 동작이 각양각색으로 표현되고 있다.

 

↑ 통천문암(通川門岩) 간송미술관

 

“해악전신첩”본은 작은 규모라 문암의 기괴한 암봉과 암벽을 다만 상악준법으로 능란하게 구사하고 미점을 성글게 툭툭 찍어 담박

하게 표현해 놓았다. 대신 흉용한 파도가 독립봉에 거세게 부딪쳐 낭화를 집채만큼 일어나게 하고 이런 거센 풍랑 속에 돛단배

세 척을 부침시킴으로써 화면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한편 8폭 병풍본 “문암”도에서는 상악준과 부벽준을 혼용하여 우뚝 솟은 바위기둥과 깎아지른 절벽의 굳세고 험준한 기상을

과감하게 표출해 내고 있다.

 

그런데 이 “통천문암”도에 이르면 삼엄한 부벽준법이 부드러운 수직쇄찰법으로 무르녹아 원만한 노숙성을 보인다. 반면 파도는

한 이랑이나 두 이랑이 화면을 뒤덮을 만큼 대형화되고 문암 사이에 시동 하나만 따른 선비가 도보로 완상하는 장면이 더 첨가된다. 세 폭 모두 동일한 구도인데 일렁이는 파도 속에 장대한 문암 바위가 우뚝 솟구쳐 일어나고 그 바위 위 맞뚫린 굴 속에서 천년

노송이 마디지게 자라나오고 있다.

 

↑ 문암, “해악팔경” 간송미술관

 

↑ 임모단원문암(臨摹檀園門巖), 장지성 개인소장

 

↑ 문암, “해악전신첩” 간송미술관

 

 

↑ 총석정(叢石亭) “해악전신첩” 간송미술관

 

고래로 총석정은 소위 관동팔경 중에서 가장 빼어난 경치로 소문나 있다. 그래서 겸재도 海嶽의 명승을 초대면하던 시기부터 이

총석정을 화폭에 올리기 시작하여 이후 무수한 “총석정”도를 남긴다. 우선 초대면 시기의 그림으로 여겨지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신묘년풍악도첩” 속에 든 “총석정”도를 보면 총석정 일대의 경관을 충실하게 사생해 놓고 있다.

 

마치 방앗공이처럼 날씬한 허리와 뭉툭한 머리 부분을 가진 채로 바닷속으로 깊이 들이밀고 있는 총석봉의 전모가 근경의 중앙에

집중적으로 표현되니 네 개의 육각 叢石柱라는 四仙峯을 포함한 총석군이 그 곁에 사생될 수 밖에 없다. 총석정은 이런 총석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총석봉 머리 부분의 상봉에 지어져 있다.

 

이렇게 총석정 일대의 경관을 근경 중앙으로 끌어들이게 되자 북쪽 대안의 喚仙亭이 중경의 일변에 나타날 뿐 나머지는 광활한

바다로 남게 된다. 그 멀리로는 卯島 穿島 등의 섬들과 세 척의 배를 띄워 놓아 원경을 삼았다. 결과적으로 이런 과도한 표현

욕구가 구성상 긴밀성을 잃게 하여 산만한 구도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후부터 겸재는 다시는 “총석정”도를 이와 같이 산만한 구도로 그리지 않고 총석정만을 화면 가득히 집중적으로 그려내는 화면

구성법을 쓰게 되는데 이 그림도 그렇게 그린 “총석정”도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70대 중반 이후 시기의 그림답게 사선봉의 개수를 셋으로 표현하고 높이도 마음대로 조정해 놓는 노련한 寫意性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 그림에서는 기둥이 두 개인 경우도 있고 주변의 총석군이 생략된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든 “총석적”도로 그 느낌이 가슴에 와 닿지 않을 때가 없으니 겸재는 사생으로부터 출발한 진경산수화풍을

이념화시키는 데 성공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옛날에 정송강도 “관동별곡”에서 이 총석정을 벌써 이렇게 읊어 진경시의 선구를 이루어 놓고 있다.

 

金蘭窟 도라 드러 총셕뎡 올라하니,

白玉樓 남은 기동 다만 네히 셔 잇고야.

공슈(工倕)[황제 때 조각을 잘하던 장인의 이름]의

셩녕[공작품]인가, 鬼斧로 다다믄가.

구타야 뉵면(六面)은 므어슬 샹(象)톳던고.

 

↑ 총석정, “신묘년풍악도첩” 국립중앙박물관

 

↑ 총석정, “해악팔경” 간송미술관

 

↑ 총석정, 이인문 간송미술관

 

 

↑ 시중대(侍中臺) “관동명승첩” 간송미술관

 

강원도 통천에서 북쪽으로 30여리 떨어져 있는 곳에 흡곡(翕谷)이란 곳이 있는데 이곳에서 다시 5리 남짓 북쪽으로 가면 동해변

에 侍中湖가 나온다. 이 호수는 동해변에 많이 있는 석호(潟湖)[파도가 모래둑을 만들어내어 생긴 호수] 중의 하나로 동해와는

다만 낮은 사구로 막혀 있어 일견하면 그대로 동해와 연결된 듯이 느껴진다고 한다.

 

臺의 옛이름은 七島가 보인다 하여 칠보대였지만 세조 때에 순찰사 한명회가 이곳에 올라 구경하였는데 우의정을 제수한다는

왕명이 마침 이르렀으므로 侍中臺라고 고쳐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사구는 유야무야로 가볍게 처리하여 호수와 바다가 광활하게 연결되도록 하고 호수 속에 있는 七寶島와 花鶴島는 “唐詩畵譜”에

있는 운중해도법(雲中海島法)[구름 속에 잠긴 섬을 그리는 법]을 본따 예리한 삼각봉으로 나타내었으며 해중 칠도는 서릿발 모양

으로 먼 해수면 가운데 점점이 띄워 놓았다. 그리고 호안 절벽 위에 그림같이 들어선 마을 위에는 강곡촌이라 기명하고 칠보대,

화학대의 명칭도 써 넣고 있다.

 

둥근 달이 동해 위로 한 발쯤 떠올라 月色이 수면에 반짝반짝 빛나니 天月, 海月, 湖月이 일색이 되어 銀派는 萬里요 水光은 接天

이라. 이런 기막힌 경치가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淸興을 못 이겨 배를 돌리니 구종들이 송림 속에 나귀를 등대해 기다리고 있다.

 

↑ 시중대, “해악전신첩” 간송미술관

 

↑ 시중대, “신묘년풍악도첩” 국립중앙박물관

 

↑ 용공동구(龍貢洞口) “해악전신첩” 간송미술관

 

이 용공동구는 울창한 송림과 높이 솟아 깎아지른 듯한 석벽, 부딪쳐 부서지며 급히 흐르는 계류수 등으로 빼어나고 그윽하며 시원

한 선계의 정취를 남김 없이 표출하고 있다. 水口 앞 길가 바위 절벽 위에서 이런 시정을 함께 나누는 두 선비 중 하나는 바로 겸재

자신인 것 같은데 나귀에서 내려 걸어온 듯 나귀 두 필은 뒤에서 구종이 몰고 온다.

 

↑ 청간정(淸澗亭) “관동명승첩” 간송미술관

 

지금까지는 휴전선 이북에 있는 금강산 일대의 海山勝景을 우리 그림법으로 그려낸 겸재의 진경산수화를 통해 감상하였다.

이제부터는 휴전선 남쪽으로 발길을 돌려 관동팔경의 하나인 청간정을 필두로 하여 감상해 보도록 하겠다.

청간정은 속초에서 동해안을 따라 간성으로 가는 국도변에 있다.

 

천후산 줄기가 내려와 가로 벌여 놓았다는 작은 산 언덕 아래로 누각형 큰 건물인 청간정이 바다와 몇 발짝 떨어져 있지 않게

표현되고 그 앞에 높게 우뚝 솟아 있는 石峯이라는 만경대가 우람하게 불끈 솟아 있다. 그 위에 천년 노송 몇 그루가 서로

마주보며 의연한 자세로 해풍을 받아 솔바람소리를 토해내는 듯하다. 그 사이 평대상에 두 선비가 시동 하나를 데리고

일렁이는 파도를 바라보며 경관에 취해 있다. 

 

↑ 낙산사(洛山寺) “해악팔경” 간송미술관

 

낙산사는 서울에서 홍천, 인제를 거쳐 설악산 한계령을 넘어 양양으로 들어가서 속초 쪽으로 북상해 가는 동해안 국도변에 위치해

있다. 설악산에서 동쪽으로 벋어나온 산줄기가 동해변에서 불끈 솟구쳐낸 오봉산(혹은 낙가산)을 등지고 동해를 내려다보며 서

있는 절이다.

 

겸재가 금강산 일대의 해악진경 8폭으로 병풍을 꾸민 속에 이 “낙산사”도가 들어 있다. 겸재가 절을 그릴 때 흔히 쓰는 방식대로

주봉인 낙가산을 울창하게 표현하고 그도 부족해 주색 찬연한 寺宇의 둘레로는 짙푸른 소나무숲을 빽빽이 둘러 놓았다.

 

이것만으로도 陰中陽의 음양 조화가 갖추어지는데, 관음굴로 이어지는 바윗덩이들을 그가 만년에 터득해낸 합문준법으로

둥글둥글 융기시켜감으로써 일렁이는 파도와 다시 한번 큰 조화를 유발해낸다.

 

뜰 안의 고목에 흰 꽃들이 만발한 것은 배꽃인 듯하고 일출을 즐기는 선비들이 앉은 곳은 梨花臺일 것이다. 관음굴 속에서 치솟는

파랑과 그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정자의 아슬아슬한 모습을 이처럼 대담하게 회화미로 승화시켜내고 있다.

 

송강 정철도 이미 그 장관을 “관동별곡”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니화(梨花)는 발셔 디고 졉동새 슬피 울 제,

洛山 東畔으로 의샹대예 올라 안자,

일츌을 보리라 밤듕만 니러하니[한밤중에 일어나니],

샹운이 집픠는 동 뉵뇽이 바퇴는 동[해를 떠받치는 듯],

바다헤 떠날 제는 만국이 일위더니[바다에서 해가 떠날 때는 온 세상이 흔들리더니],

텬즁의 티뜨니 모발을 혜리로다.

아마도 녈구름 근쳐의 머믈셰라.

시션(詩仙) 어데 가고 咳唾만 나맛나니.

[이백은 어디가고 그의 시(등금릉봉황대)만이 남았느냐?]

텬디간 壯한 긔별 자셔히도 할셔이고.

 

↑ 죽서루(竹西樓), “관동명승첩” 간송미술관

 

우리 나라 보물 213호인 죽서루는 삼척시 성내동 9번지에 있다.

이는 관동팔경 중의 하나로 꼽히는 명승지로서 송강은 “관동별곡”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진쥬관(眞珠[삼척의 옛이름]館) 죽서루 오십쳔 모든 믈이

태백산 그림재를 동해로 다마 가니,

찰하리 한강의 木覓의 다히고져.

왕뎡(王程)이 유한하고, 풍경이 못 슬믜니[싫지 않으니]

幽懷도 하도 할샤, 객수도 둘 듸 업다.

션사(仙槎)[울진의 옛이름; 신선이 탄다는 뗏목]를 띄워 내여 斗牛로 향하살까

션인을 차자려 丹穴[고성군 남쪽 10리, 신라 사선이 놀았다 함]의 머므살까.

 

절벽 위에 죽서루가 2층 누각의 형태로 번듯하게 자리잡고 그 동쪽으로는 연근당이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경영되었으며 서쪽

으로는 응벽헌이 바위 밑에 살짝 숨어 있다. 응벽헌 서쪽으로 나 있다는 돌길을 암시하기 위해 절벽에 사다리를 결쳐 놓았는데

이를 타고 수담(修潭)에 떠 있는 배에 오르는 모양이다.

 

물소리가 철철철 들린다는 연근당 벼랑 아래는 물목이 좁고 하상이 높은 듯 여울지는 물결 표현이 분명하여 정녕 그 소리가

들리는 듯 눈에 선하다. 연근당에 담장을 두른 것은 그 위태함을 강조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바위 절벽을 대부벽준법으로 크게 쪼개듯 표현하고 산부추의 표시인 듯 바위 틈서리에는 苔點을 많이 찍어 놓았다. 平蕪한 절벽

위의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해서인지 노거수 두어 그루가 죽서루 좌우에 서 있을 뿐 송림의 표현은 극도로 자제되었다. 수담 위로

미끄러지는 거룻배 위에서는 세 명의 선비가 죽서루 경치에 취해 있는데 누각 위에서는 기생 셋이 서성이며 이들을 기다린다.

조촐한 주안상도 마련돼 있으리라.

 

↑ 성류굴(聖留窟) 간송미술관 

 

경북 울진군 近南面 九山里에 있는 명승으로 하늘을 찌를 듯한 석봉 아래 연륜이 2억 5천만 년이나 되는 鐘乳窟이 400여 미터

길이로 뚫려 있다. 그 아래로 왕피천 맑은 물이 굽이쳐 흘러 이곳에 이르면 마치 선계에 오른 듯한 느낌이 든다 해서 仙遊窟이

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이것은 원래 石溜窟 즉 돌물이 떨어져서 이루어진 석회암굴이란 뜻의 이름으로부터 발음상 같은 聖留窟이라는 불교적 색채가

깃든 이름으로 바뀐 듯하다.

 

그림에서 보면 거대한 암봉은 청묵으로 쓸어내리는 수직 쇄찰법을 과감하게 구사하여 천 길 절벽이라는 사실을 강렬하게 표현해

놓고 있는데 바위 끝에 천년 노송을 가득 채워 놓아 더욱 하늘을 떠받칠 듯 솟구치는 기세를 북돋우고 있다.

 

밋밋하게 단일 색조로 쓸어내리기만 하면 자칫 용솟음쳐 오르는 암봉의 기세가 손상될까 보아 수직 쇄찰을 가하면서 짙고

옅으며 느리고 빠름의 묘를 곳곳에서 살려 놓고 그도 부족하여 태점으로 이를 보안하고 있다.

 

성류굴이 있는 하단에 이르면 마치 괴수의 두 눈처럼 빠끔히 뚫린 굴 주변으로 둥근 바위덩어리들이 알심 있게 표현되며 짙은

솔숲이 그를 에워싼다. 이때도 많은 탐승객들의 내왕이 있었던 듯 왕피천 냇가 벼랑을 따라 난 길이 굴 앞 너른 공터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 망양정(望洋亭) “관동명승첩” 간송미술관

 

현재 망양정은 울진읍 남쪽에서 동해로 흘러드는 왕피천 하구 남안인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716의 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1859년 平海로부터 이전해 놓은 것이지 원래 있던 것이 아니라고 한다.

 전해 오기로는 울진에는 관동팔경 중 한 곳의 명소도 없는데 평해에는 越松亭과 함께 두 곳이 있으니 그 하나를 나눠달라 하여

 

옮겨 온 것이라 한다. 그러니 겸재의 이 “망양정”도는 원위치인 울진군 기성면 망양리에 있던 망양정의 원모습이다. 

비만 오려면 큰 종이 울 듯이 소리가 난다는 縣鐘山 산자락이 동해와 맞물리는 천 길 절벽 위에 높이 지어졌다던 망양정의 모습이

이 그림에서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현종산 산자락이 급하게 내려오다 동해의 격랑에 부딪쳐 주춤 물러서며 불끈 솟구쳐낸 수직

절벽이 까마득한데 그 끝에 제비집처럼 위태롭게 정자를 세웠다.

 

규모도 웅장하여 정면 3칸 측면 2칸의 날아갈 듯한 팔작 기와집으로 석축을 높이 쌓아 든든한 느낌이 든다. 그 뒤로는 정자의 부속

건물이 산자락에 기대어 지어졌는데 솟을 대문에 담장이 이어져 있어 마치 대가집 사랑채거나 행랑채처럼 보인다. 이런 건물이

있어 해풍에 언 몸을 안온하게 녹일 수 있다면 망양의 정취는 오롯할 것이다.

 

↑ 월송정(越松亭) “관동명승첩” 간송미술관

 

월송정은 현재 경북 울진군 平海邑 月松里 362의 2번지 동해변에 위치해 있다. 빽빽이 들어찬 장송림을 화면 중앙에 대담하게

배치하고 짙푸름이 흥건히 베어난 潑墨法으로 가지와 잎새를 먹구름처럼 칠해 놓는 겸재 특유의 소나무 그리는 법을 분방하게

구사하여 萬株 松林의 정취를 유감없이 드러내었다. 그 북쪽으로 용뿔처럼 생겼다는 바위봉우리가 바다 속으로 돌출해 있고

남쪽으로는 석축으로 쌓은 듯한 돈대 위에 누각이 서 있다.

 

문루 형태로 되어 있으니 아마도 월송정은 울릉도 일대까지 해안 경비를 관장하던 월송진성(越松鎭城)의 성문 구실도 겸했던 것

같다. 그 아래로는 越松萬戶가 들어 살던 관청과 관사인 듯한 기와집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정자 아래로는 반달같이 생긴

內灣이 놓여 있고 그 내만 밖으로 일망무재한 동해 바다가 전개된다.

 

내만 해안에 십리 백사장이 있으니 지금 월송리 해수욕장이 바로 그곳이다. 지금도 월송정 가는 길은 황보천을 따라가는데

그때도 그랬던 듯 냇가 둑길로 나귀 탄 나그네 하나가 솔숲에 싸인 마을 어귀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 금강전도   1734년, 종이, 수묵담채, 130.7X94.1, 호암미술관 소장


《금강전도》에 나타난 필법은 거센 필선으로 중첩(重疊)한 무수한 봉골(峯骨)을.--정선의 그림이 한국 산천의 정기를 여실히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여느 상념적인 산수화가들과는 달리. 조국과 국토를 사랑하고. 이 땅에 사는 기쁨을 그의

예술의 생명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진경산수(眞景山水)로 나타나고. 오랜 수련과 모색을 통하여. 난시준(亂柴皴) 이나 수직묵렴준(垂直墨簾皴)

같은 독특한 준법(皴法)을 낳아서. 한국산수화의 한 정형을 이룩해 놓은 것이다.


그의 진경산수에는 금강산이나 동해안을 주제로 한 것이 많은데. 노년기의 작품으로 보이는 이 금강전도는. 한폭의 좁은 공간에

금강산 1만2천봉을 압축해 놓은 것으로. 부감법(俯瞰法)의 그 자연 관조는 매우 새로운 시도로. 후일 많은 추종자를 낳았다.

금강전도는 겸재의 진경 표현을 완성한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1734년, 그가 만 58세 때 그렸는데 전형적인 금강산 표현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반조감도적(半鳥瞰圖的) 전경(全景)

포착과 원형(圓形)구도, 미점(米點)의 윤택한 토산(土山)과 수직준(垂直)의 개골 암산(巖山)의 대조적 배치, 농묵(濃墨)의 편필

(偏筆) 수목 표현과 암산을 날카롭게 강조해 주는 담채(淡彩)처리 등은 그가 이룬 진경(眞景)의 작품세계를 압축해 놓은 것이다.


이러한 그의 회화세계는 18세기 화단을 크게 자극하여 진경산수의 유행을 가져왔고 많은 화가들이 그의 화풍을 따르게 되었다.

이 작품은 좌측 미점(米點)의 토산(土山)에 장안사(長安寺), 표훈사(表訓寺), 정양사(正陽寺) 등 내금강 명찰들이 그려지고 멀리

주봉인 비로봉(毗盧峰)을 중심으로 흐끗희끗 눈 덮인 개골산의 제암봉(諸岩峰)을 담고 있다.

 

「금강전도」 재해석 한신大 오주석씨 논문 발표

조선 중기의 대표적 화가인 謙齋(겸재) 鄭(정선)의 실경산수화 「금강전도(金剛全圖)」(국보 제217호·1734년작·호암미술관 소장)

를 주역(周易)의 원리를 적용해 해석한 논문이 발표됐다. 화제의 논문은 吳柱錫(오주석)한신대강사가 쓴 「옛 그림이야기7,8」로

박물관신문(국립중앙박물관 발행)2,3월호에 게재될 예정이다.

 

「금강전도」는 정선이 금강산 만폭동을 중심으로 내금강의 전경을 그린 것. 전체적으로 원형구도이며 그림 윗 부분에 비로봉이

 

있고 그곳에서 화면의 중심인 만폭동을 지나 아랫부분 끝에는 장안사의 비홍교가 그려져 있다. 그동안 미술사학계에서는「금강전도」의 그림 왼쪽은 무성한 침엽수림이 어우러진 부드러운 토산(土山)이고 오른쪽은 화강암의 예리한 봉우리들로서 각각 음(陰)

과 양(陽)의 대조를 이루며 좌우가 S자 모양으로 분할되는 태극문양을 나타낸다는 정도의 견해는 있었다.

 

그러나 오씨는 이 글에서 「금강전도」에 나타난 음양 대비를 구체적으로 고찰하고 오른쪽 위에 쓰여진 제시(題詩)의 행(行)배열

과 기년명(紀年銘·작품 제작시기)에 담긴 의미를 역리적(易理的)으로 해석해낸 것이다. 오씨는 우선 『전체적으로 동그라미를

유지하기 위해 왼쪽과 오른쪽 아래를 여백으로 남겨놓았다』고 보고 『유난히 크고 불뚝한 비로봉과 지나치게 크게 뚫려 있는

비홍교가 노골적으로 양(남성)과 음(여성)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역리적 해석의 열쇠는 오른쪽 위에 적힌 제시와 기년명. 56자 11행의 칠언율시(七言律詩)인 제시는 그 행배치가 매우

특이하다.가운데 제6행이 1자, 5,7행이 각 2자, 3,4,8,9행이 각 4자, 2,10행이 각 7자씩이고 1행이 10자,11행이 11자로 돼있다.

 

이에 대해 『각행의 끝자를 연결하면 반원을 이루고 이것은 다시 금강산 윤곽과 어울려 하나의 원을 형성한다』고 설명. 제시

밑에 적힌 기년명(甲寅 冬題·갑인년 겨울이라는 뜻)에 대해 오씨는 『갑(甲)과 인(寅)은 음양으로는 양, 오행으로는 목(木), 숫자

로는 3이 된다. 겨울은 다음해인 을묘년으로 이어지는데 을(乙)과 묘(卯)는 모두 음 목 8』이라면서 3,8은 성리학에서 매우 의

미심장하다고 풀이했다.

 

성리학의 출발인 「대학」은 3강령과 8조목으로 요약된다는 점, 성리학을 완성시키는 「주역」의 64괘는 8괘(8×8)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8괘는 태극이 세번 변한 것이라는 점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주역의 대가 정선의 「금강전도」는 금강산의 웅혼한

기상을 그려냈을 뿐 아니라 탁월한 조형 속에 주역을 응용해 조선왕조의 번영과 평화, 심오한 철학적 이치를 담아낸

걸작이라는 것이 오씨의 결론이다.

 

☞ 자료출처 :  이광표 기자 / 동아일보

 

▒ 겸재 금강첩[謙齋金剛貼]

 

↑ 謙齋 金剛貼  장안사(長安寺)

 

↑ 謙齋 金剛貼  금병암 (琴屛巖)

 

↑ 謙齋 金剛貼 시중대(侍中臺)

 

↑ 謙齋 金剛貼

 

↑ 謙齋 金剛貼 파금정(坡襟亭)

 

↑ 謙齋 金剛貼 맥파(麥坂)

 

↑ 謙齋 金剛貼 구룡포(九龍洞)

 

↑ 謙齋 金剛貼 비봉폭(飛鳳瀑)

 

↑ 謙齋 金剛貼 선담(船潭)

 

↑ 謙齋 金剛貼 효운동(曉雲洞)

 

↑ 謙齋 金剛貼 원통암 (圓通庵)

 

↑ 謙齋 金剛貼 수미탑 (須彌塔)

 

↑ 謙齋 金剛貼 묘길상(妙吉祥)

 

↑ 謙齋 金剛貼 마하연(摩河衍)

 

↑ 謙齋 金剛貼 은선대 (隱仙臺)

 

↑ 만폭동  비단수묵담채 서울대학교 박물관 

 

물이 흐르는 굽이치는 자연스러운 필치가 불쑥 불쑥 솟은 산봉우리와 어울려 정답다.

 

↑ 비단 담채, 117.9x97.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만폭동도와는 완연하게 다른 정선의 작품이다. 김홍도의 스승 강세황이 극찬했다한다. 

중년에 들어서서 그린  완숙함이 묻어나는 그림

 

↑ 총석정 겸재 정선 63세시

 

↑ 총석정 (겸재정선 72세시)

 

↑ 총석정 겸재 정선 70대 후반 추상화 경향 보임  

 

↑ 금강내산(金剛內山) 선면

 

↑ 장안사(長安寺)

 

↑ 비로봉도 (毘盧峯圖 )

 

謙齋 鄭敾이 그린 금강산 그림 중에는 간혹 斷髮嶺望金剛圖라는 작품들이 있다. 대개는 작은 소품에 불과하지만 단발령에서 먼

동해쪽 금강산을 바라보고 있는 두 세 사람의 선비들을 近景으로 하고 안개 저쪽에 솟아오른 비로봉과, 이를 둘러싼 금강 連峯을

遠景으로 그린 직품들이다.

 

이러한 겸재의 그림을 본 사람이면 으레 단발령에 올라서면 환하게 터진 동해쪽으로 금강산이 그림처럼 아름답게 펼쳐져

보이려니 하는 생각을 할 법도 한 일이다.

 

春谷 高羲東(1886~1965) 선생이 아직 동경미술학교 학생이던 때 이 단발령망금강도의 實景을 보고자 李道榮 선생과 함께

일부러 먼 길을 돌아서 단발령에 올라보니 청명하게 갠 날씨에 시야는 끝간데 없이 맑은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금강산 같은

것은 보이지 않자, 춘곡 선생은 비로서 겸재의 그러한 그림이 익살스러운 상상화였음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바로

그분에게서 들은 일이 있다.

 

겸재처럼 금강산을 올바로 보고 느끼고 또 지극히 사랑한 화가는 과거에 또 없었고, 눈을 감으면 바로 그의 머리 속에는 금강산

1만 2천봉 굽이굽이가 선하게 펼쳐젔을 것이니 그러한 환상을 가져봄 직도 한 일이다.

 

어째든 이 毘盧峯圖 대폭을 바라보면 호방한 그 분의 氣槪나 구상의 雄渾함에 압도되면서 단발령망금강도 이야기가 언뜻

생각나서 엄숙에 가까운 야릇한 흥겨움마저 느끼게 된다.

금강산을 그려서 이처럼 큰 氣宇를 표현한 예가 과거의 어느 화가에게도 없었고, 이처럼 큼직한 폭을 숨돌릴 사이도 없이

빠른 붓끝으로 단숨에 그려 낸 듯싶은 이 작가의 장한 筆力 같은 것은 다시 길러지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한다.

 

금강산을 그리려면 바라보는 각도와 화면 구성이 천태만상일 수 있지만, 비로봉의 웅대함과 皆骨山 1만 2천의 신비스러운 봉들을

이처럼 신나게 단폭의 화폭에 구성한 그 상상력은 架空的이라고 탓하기보다는 오히려 금강산의 크고 장엄함을 너무나 올바로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靈感의 세계라는 느낌이 깊어진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모양의 비로봉이나 흘립(屹立)한 산봉들은 실경으로는 아무 곳에도 없지만 금강산의 크고 맑은 정기를

이보다 더 집약적으로 멋지게 표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먹빛의 濃淡을 가려서 쓴 水墨一色의 붓자국의 자유자재라든지 붓끝의 움직임에 마디마디 맺힌 힘과 속도를 자신있게 간직한

점이라든지 좀처럼 아무도 흉내내기 힘든 筆跡임에 틀림없다 하겠다. 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구상은 금강산을 夢寐間에도

잊지 못하고 살아온 겸재가 꿈속에서 얻은 영감의 소산이라고나 할는지.

 

어째든 범속한 화가의 붓끝으로는 엄두도 내기 힘든 후련한 그림이며 잔재주를 부릴 줄 모르는 한국의 아름다움이란 때로는

이렇게 웅혼할 수도 시원스러울 수도 있다는 것의 표본을 우리는 이 그림에서 역력히 보았다는 느낌이다.

 


2016/01/13 - 휘뚜루 -

진흙속의 연꽃

 

출처 : 산으로, 그리고 또 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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