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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에 관한

감악산(紺岳山)을 맴도는 설인귀(薛仁貴) 귀신(鬼神)

by 휘뚜루50 2020. 12. 13.

▒ 감악산(紺岳山)을 맴도는 설인귀(薛仁貴) 귀신(鬼神)

(조선왕조의 사대와 넋나간 일부 공직자의 역사왜곡)

고구려가 멸망하고 796년이 흐른 1464년 (세조 10년) 9월, 권남(權擥)은 감악산(紺岳山) 정상에 차려진
당나라 설인귀(薛仁貴)의 산신당(山神堂)에  병치례 치성 기도를 하며 설인귀와 대화를 이어 간다. 

“신(神)은 당나라 장수이고, 나는 일국의 재상이니, 비록 선후가 같지 않더라도 세는 서로 비슷한데, 

어찌 서로 군박(窘迫)하게 굴기를 이와 같이 하는가?”하니,

무당이 신어(神語)로 노하여 말하기를 “그대가 감히 나와 서로 버티는데 돌아가면 병이 날 것이다.”라 

했다. 고구려를 초토화 시킨 주역이 조선의 산신령이 되어  이 땅 중신에게 접대를 받고 있음이다. 

이 같은 사실은 길창부원군 권남이 하직하고  개성부에 가서 감악에 기도했다는 실록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권람은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김종서, 황보 인 등 대신들을 제거하고, 세조 집권의 토대를 마련

하였다. 그 공으로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승정원 동부승지에 특진되었다. 세조는 ‘그를 보낸 

뒤에 승정원에 명하여 경기 관찰사에게 치서(馳書)하여 후하게 음식을 준비하여 공돈(供頓)하게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면 권람의 위상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하게 한다. 세조 3년에 내려진 

고대사서 수거령에 보이듯, 중원을 지배한 천손민족의 기록 자체를 말살한 정황으로 보아 

명나라에 대한 사대로 시작된  조선조의 한 단면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감악산에 대한 기록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1170년 고려 무신난 때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金敦中)이 

도망해 들어 간 곳이 감악산이고, 정중부의 추격으로 잡혀 죽음을 맞은 곳이다. 이 시기의 고려의 

영토는 하남성을 깃점으로 절강성까지 비정되어 있음을 볼 때 그 곳의 감악산이 한반도에 심어진 

것으로 보인다.

1311년 고려사절요 충선왕 3년조에 보면, 그때의 풍속이 귀신을 숭상하여 공경과 사대부와 서인이 

모두 직접 감악산에 제사지냈으나, 이후 금지하였다고 썼다. 이 기록을 감안한다면 산신당은 이 때

에도 이미 조성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악’의 한자표기가 岳과 嶽으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외에 고려조의 사료 어느 곳에서도 감악산과 설인귀와 연계된 기록이 없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 볼 때 권람과 설인귀의 대화는 조선 개국 이후 명나라의 속국 개념에서 세조조

에 산신당을 건립, 설인귀를 산신으로 격상시켜 안치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이같은 사실적 내용을 고구려의 대당 전쟁 기록에서 살펴 보자.

"강소성 염성에서는 연개소문과 당태종의 전투에서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쫓기다 우물에 숨어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났는데 목숨을 건진 것에 감격하여 그 우물터에 몽롱보탑과 정혜사를 

세웠으며, 그것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강소성 태주에 호국사가 있는데 당태종이 역시 

연개소문에게 패하고, 칠성장에 숨어 있다 살아나서 나중에 세운 절 이름이다.  

강소성 숙천에는 고구려 연개소문 부대가 당나라 설인귀와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던 

유적이 남아 있는데 설인귀가 숨어 있었다는 장군동, 망을 보던 장대와 찬밥을 먹던 냉반대, 

과광산, 오자산 등의 유적이 있으며, 고구려 군사가 주둔하던 청량원이 있다. 인근의 묘에서는 

1996년에 투구와 철검 등이 출토되었다 한다.
 
강소성 비주에도 연개소문과 설인귀의 전투유적이 있다" 바로 설인귀가 숨어 있었다는 장군동, 

망을 보던 장대와 찬밥을 먹던 냉반대, 과광산, 오자산이 사대에 충실한 조선에 의해 한반도의 

감색과 유사한 감악산으로 지명 이동한 것은 아닌가 한다. 
 

▲ 설인귀 굴로 알려진 감악산 동굴. 참으로 해괴한 역사왜곡이다. 
 

▲ 감악산 동굴에 대한 설명 

조선조는 개국 직후 스스로 제후국을 자임, 하늘제사를 폐지하고 명산 대천과  여러 산천에 

당례악지(唐禮樂志), 문헌통고를 참고하여 국무당(國巫堂)과 감악산, 덕적산(德積山), 목멱산

(木覓山), 삼성(三聖)에 기양제(祈禳祭)를 행하였다.

1400년 1월 정종이 술과 고기를 가지고 감악산에 제향하여 기도하였다는 기록과, 1409년(태종 9) 

적성현(積城縣) 감악산의 신당 남쪽 봉우리의 돌이 무너졌는데, 길이가 87척이고, 너비가 38척이

었다는 사실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 및 조선시대 초기까지는 32.21cm를 1자(1척)로 했으

나, 세종 12년 개혁 때에 31.22cm로 바꾸어 사용했다. 조선 초기 단위로 보면, 길이가 약 28m, 

너비가 12m로 신당의 규모가 상당히 컸음을 보여 준다.

세종도 1422년 3월 사람을 보내어 감악산의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1,500년 연산군은 감악산 

신당의 제청을 고쳐 짓는데 수군이 1백 40일의 역사를 하였고, 의정부에서 중지할 것을 건의하자 

연산은 감악산, 마니산의 집 짓는 일은 이것이 성신(星辰)에 제사 드리고, 신께 제사 드리는 곳이

니 정파할 수 없다고 거절한다. 1531년 중종조에 보면, ‘예조가 경기 근방에서 비를 빌어 가장 

영검이 있었던 곳‘으로 지정한 것으로 보아 기우제를 거행하고, 기도처로도 활용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감악산의 위치는 강원도 원주지역과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양주군 남면을 비롯해 연천군 전곡읍

에 걸쳐 있는 2개의 산 이름이다. 역사 기록에 나타나는 위 감악산은 경기 지역의 산이다. 산신당

은 현재 보이지 않으며,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된 감악산비가 감악산 정상에 있다. 이 비는 경기

도 파주시 적성면 객현리 산25번지에 있으며, 기단부, 비신, 객석을 갖춘 화강암 석비로 높이는 

170cm, 너비 70~79cm, 두께 15~19cm의 규모이다. 비문은 마모되어 확인할 수 없다. 이 비는 

설인귀비, 빗돌대왕비 등으로 구전되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 따르면, 감악산 정상 부근에 설인귀 

굴, 임꺽정 굴로 알려진  굴이 있는데 이 설은 고구려를 치러온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이곳에 

진을 쳤다는데 따른다고 했다.
 

▲ 설인귀비로 알려진 감악산 정상 비석. 역사왜곡으로 설인귀는 한반도까지 올 수가 없었다.   
 

▲ 감악산비

1,300여 년 세월을 넘나드는 설인귀의 끈질긴 집착은 경기도 양주시 남면의 한 무당집에서  노랑

색깔의 임금님 복장으로 감악산신령이 되어 지금도 이 나라 백성들을 맞고 있다. 야합한 통일 

신라의 귀신들과 함께 조선의 중신을 접견하고, 고구려 멸망 후 2,300여 년 동안 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음이다.

감악산 자락에 자리한 한 지방 관청이 역사를 올바르게 계도해야 함에도 설인귀가 이 고장 사람

이라 버젓이 홍보하는 작태를 연출하고 있다. 천손민족의 뿌리 근원도 저버린 조선왕조의 사대 

근성과 이에 부화뇌동한 조선 사대부의 행동, 그리고 오늘을 사는 넋 나간 일부 공직자들의 

행위가 오늘의 역사를 아프게만 한다.

-한눌의 '고대사 메모' 중에서

▲ 연개소문이 칼 다섯자루를 던지자 설인귀가 활을 쏴 맞추는 그림.

이 일로 설인귀는 당태종에 눈에 띄어 승승장구한다.


▶ 설인귀(薛仁貴, 614~ 683)
당나라의 장수로 강주(絳州) 용문(산서성 직산현) 사람이다. 645년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

할 때 군졸로 응모, 안시성 공방전에서 공을 세워 유격장군으로 발탁되었다. 658년 우령군 중랑

장으로 임명되어 고구려 원정에 나섰으며, 이듬해 횡산에서 고구려군에게 패했다.
 
666년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죽고 그 장남 남생이 아우 남건·남산에게 쫓겨 당나라에 

와서 원병을 청하자, 좌무위장군으로 요동안무대사 계필하력을 도와 다시 고구려를 침략했다. 

그는 남건의 군사를 격파하고 남소·목저·창암 등 3성을 함락시켰다. 668년 부여성·평양성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자, 그는 검교안동도호로 취임했다. 

671년 계림도행군총관으로 신라를 침입했으며, 675년 신라의 천성(泉城)을 공격했으나 실패

했다. 이듬해 다시 침략했으나 소부리의 기벌포에서 패했다. 681년 과주자사·대주도독으로 

임명되었으며, 다음해 돌궐을 격파했다. 뒤에 본위대장군으로 임명되고 평양군공에 봉해졌다.

☞ 자료출처 /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2020/12/13 - 휘뚜루 -

영혼의 피리 / 김영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