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길산(雲吉山:610m)에서 예봉산(禮峰山:683m)까지 적설(積雪)산행을 하다.
- 2012/12/06 -
전날(12/05), 서울에 약 10cm의 눈이 내려고, 영하 10도의 강 추위가 휘몰아처서 온 세상이 꽁꽁 얼붙은..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마져 추위에 떨게하는 날씨였다. 춥다고 웅크리면 더 추운법.. 그래서 날만 밝으면 난 산으로 갈 것이다. 일반적으로 요런 날씨에는 사람들은 산에 가기를 꺼린다.

그러나 산을 좀 다닌 사람들은 이런 날씨에 산으로 가는 것을 오히려 즐긴다. 왜냐하면 이런 악조건의 날에는 특히 근교산에는 사람들이 적고 자기만의 스타일로 산을 오붓하게 감상할 수 있으므로..^^

그래서 선택한 산이 근교에 있는 운길산에서 예봉산까지 적설산행을 하기로 했다. 특히나 운길산 수종사에서 바라보는 두물머리의 아름다운 영상은, 눈이 온 다음날 강추위가 몰아치는 날씨면 틀림없이 선명한 영상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른 새벽에 집을 나와 지하철를 이용하여 운길산역에 내렸다.

예상대로 산으로가는 미친(?) 녀석은 나 밖에 없다. 운길산 들머리로 가는 강변길에 들어서니 아침 일출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지만, 살갖을 아리게하는 강추위가 모든 오감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일단 강변을 벗어나 산길에 접어드니 추위는 한결 부드럽게 느껴진다. 아무도 가지 않은 첫 눈길에 흠집을 내며 걸었다. 대략 10cm의 적설량이 쌓여 있는 오름길에서 인증샷을 남기며 걸었다.

요즘 서울 근교산을 다니며 보니 이런 전망대를 설치한 곳이 여러곳 보이는데.. 실제로 전망도 별 볼일 없는 곳에 왜 이런 비싼 투자를 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전시행정은 이제 제발 그만 하였면 좋겠다.

전망도 별 볼일 없는 전망대를 내려와 수종사를 들리려고 임도길에 들어서니 절로가는 첫 발자국이 보인다. 누구일까..? 방금 지나간 발자국인데.. 등산화 발자국이 아니고 운동화 발자국이다. 오늘같이 추운날, 나 보다 이른 새벽에 절로간이는 과연 누구일까..?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는 발자국을 따라 갔다.

그렇게 임도길을 따라 오르다가 심심하기에 고드럼이 매달려 있는 절개지에서 그림자놀이 인증샷을 하였다. 현재 이 정도의 고드럼 현상이라면 아마도 영하 10도 이하의 날씨임에 틀림이 없다.

구비구비 돌고 돌아 오르는 임도길을 따라 오르다보니 스님 한분이 부지런히 눈길을 내고 있었다. 불자는 아니지만 잠시 합장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첫 눈길의 새벽 손님은 누구냐고 물었다. 수종사에 신도님인데 오래전부터 새벽 예불을 드리러 오시는 70대 할아버지라고 하였다.

스님이 눈가래로 힘들게 치워 준 사이길을 따라 나는 조금은 편하게 걸었다.

운길산 수종사 일주문이다. 임도길인줄 알았는데, 길은 여기서 끝나 있었다. 그러니까 이 길은 수종사 전용산길이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이 길이 만들어진 해가 88올림픽이 열리던 해로 기억 된다.

일주문을 지나는데 요란한 괭음을 내며 지나가는 바람맨(?)을 만났다. 자세히보니 산에서 벌목을 할때 쓰는 발동기에 진공바람을 이용하여 눈을 불어쓸기을 하는 장치였다. 간단히 말해 진공청소기의 반대형이였다.

이름하여 [명상의 길]이라 하는데.. 조금전에 만난 [진공 바람 맨] 때문에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불이문(不二門)이다. 불이문(不二門)은 중생과 부처, 미망과 깨달음, 생사와 열반등 온갖 상대적인 개념들을 초월하여 모든것이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경지에 계신다는 사실을 공간적으로 상징해 놓은 것이 불이문(不二門)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나는 내가 아니요 수종사요 운길산이렸다.

수종사(水鐘寺)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세조가 금강산을 구경하고 수로(水路)로 한강을 따라 환궁하던 도중 양수리(兩水里)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갑자기 종소리가 들려와 기이하게 여겨 다음날 조사해보니 운길산에 고찰(古刹)의 유지(遺址)가 있다고 하여 가 보았다.

그 바위굴 속에서 16나한을 발견했으며 굴 속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암벽을 울려 종소리처럼 들린 것임을 알게 되어, 이곳에 돌계단을 쌓고 절을 지어 수종사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절에는 현재 1439년 (세종 21)에 세워진 정의옹주(貞懿翁主)의 부도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창건은 그 이전이며 세조연간에 크게 중창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뒤 조선 말기에 고종이 풍계(楓溪 : 楓漢)에게 비용을 하사하여 중창하게 했고, 1939년에는 태욱(泰旭)이 중수했으며 6·25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74년에 주지 장혜광(張慧光)이 대웅보전 등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보전·나한전·약사전·경학원·요사채 등이 있다.

오른쪽에 있는 것이 수종사 다보탑이다. 본래 수종사 경내에서 동쪽으로 벗어난 언덕진 곳에 있던 것을 1970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 기단부는 2단의 8각 지대석을 계단식으로 올린 위에 상대석, 중대석,· 하대석으로 이루어진 기단이 있고 다시 그 위에 5층의 탑신이 있는 구조이다.
8각 지대석에는 각 면마다 안상을 음각하고, 기단부의 하대석과 상대석에도 안상과 함께 단판(單瓣)의 복련과 앙련을 각각 선각에 가깝게 부조했다. 5층의 탑신은 높이와 폭이 점차 줄어 들었으나 기단부가 높고 좁아 전체적으로 세장(細長)한 형태로 안정감이 적다. 탑신 표면에는 각 모서리마다 원형의 석주형(石柱形)을 모각(模刻)하고 그 옆으로 가는 우주(隅柱)를 새겼다.
옥개받침은 3단이며 낙수면과 전각부(轉角部)의 반전은 있으나 옥개석의 폭이 좁고 두터워 둔한 느낌을 준다. 옥개석의 전각 끝마다 풍경이 달려 있고, 상륜부는 일부 파손되었으나 8각의 노반(露盤)·보륜(寶輪)·보주 (寶珠)가 놓여 있다.
1957, 1970년에 탑의 여러 부분에서 금동불감, 목조불감 및 목조불상, 금동불보살상 등 조선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탑의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출토된 불상과 관련하여 1459~93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와 거의 같은 모습의 8각7층탑이 인근 남양주군 와부읍 월문리의 묘적사에 있어 주목된다.

툇돌 위의 스님 신발이 무엇인가 말을 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나는 알아 듣지를 못하고 있는가..^^

조선시대 문인 서거정이 동양최고의 절경을 가진 사절이라 극찬했던 수종사이고, 그 사찰에서 두물머리의 풍경을 가장 편안하고 한가롭게 바라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삼헌정(三鼎軒) 다실이다.

그래서 수종사 동산스님이 누구라도 와서 편하게 명상하고 한가로운 여유를 만끽하여 속세의 시름을 털고 가는 휴식처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지금은 무료다실 삼정헌(三鼎軒)을 개원하고 있다. 그런데, 너무 이른 아침이라 아쉽게도 삼헌정(三鼎軒)은 아직 문이 닫혀있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장면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수종사 최고의 전망대이다.

절집 은행나무옆에서 바라보는 두물머리의 풍경은 덧 입은세월과 상관없이 예전 그대로이다. 어느때에는 함께했던 사람과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바라 보았는데.. 지금은 혼자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500년전 조선의 세조 임금님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그 세조는 떠나 갔지만, 은행나무는 아직도 위풍당당하다.

그런데, 산 아래에 있는 은행나무들은 하늘을 향하여 대체로 일자형으로 뻗어 있는 편인데, 이 수종사 은행나무는 산위에 있어서 그러한지 대체로 옆으로 퍼져있고 휘구부러진형으로 자라고 있다.

다시 해탈문을 통하여 산사 안으로 들어갔다. 문득 서산대사의 한 말씀이 생각났다. [버릴 것은 버려야지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있으면 무엇하리요. 줄게 있으면 줘야지 가지고 있으면 뭐하노..]

산사는 아직 이른 아침이라 고요함만이 흐르고 있다. 다만 어쩌다 지나가는 산사의 바람에 가냘프게 흔들리는 인경소리만이 아침고요의 적막을 가르고 있을 뿐이다.

갑짜기 내린 폭설과 강추위 때문인지 꽤나 시간이 흐른 시간인데도 산사를 찾아오는 산객이 한명도 없다. 대략 한 시간이상 산사에 머물다가 운길산 정상을 향하여 산사을 떠났다.

정상으로가는 급경사길에는 평균적으로 10cm 이상의 적설량이 쌓여 있어서 조심하며 천천히 올랐다.

그렇게 쉼하며 산 능선에 올라서니 아무도 가지 않은 능선길에는 평균적으로 적설량이 30cm 이상 쌓여있었다.

또 바람이 휘몰아 쉬다가는 곳은 50~80cm이상 쌓여 있어서 산행에 상당한 시간을 소요되게 하였다. 하여.. 눈길 걷기가 힘들때는 쉬어가는 의미로 나만의 그림자 놀이로 인증샷을 하였다.

정상 직전 헬기장 한쪽에는 산악회의 리본 전시회가 펼처지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리본색 중에서 노란색상이 단연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옛날에는 빨간색상의 리본이 압도적이였는데, 이것도 시대변화의 흐름인가~?

정상 직전에 본 운길산 정상모습이다. 협소한 정상을 위하여 나무테크를 만든 일은 아주 잘 한 일인것 같다. 실제로 단체 산악회원들이 함께하기에는 상당히 좁았던 정상을 이렇게 넓힌것은 굿 아이디어이다.

운길산(雲吉山:610m) 정상 표시석이다. 구름이 가다가 산에 걸리어 멈춘산이라 하여 운길산이라 했다고 한다. 멀리 왼쪽으로 오늘 내가 휘돌아 가야 할 예봉산이 보인다.

운길산 정상에서 나무가지 사이로 본 북한강과 용문산 전경이다.

오른쪽 잔나무가지 옆으로 보이는, 지난 여름의 끝자락에 다녀 온 천마산이다.

오늘 가야 할 능선 뒤로 복한산과 도봉산 전경이 흐미하지만 파노라마로 보이고 있다.

예상대로 날씨는 계속 청명하여 정상에서의 일망무제를 감상하고 양지바른 아래쪽에서 간식을 먹고 있으려니 주변에 난데없이 나타난 작은 산새들이 아우성이였다. 처음에는 몬(?) 일인가 하였는데..곧 그네들이 먹을것을 달라는 것을 알아 차리고 내가 먹던 비스켙을 쪼개어 눈위에 펼처 놓았더니 게눈 감추듯 먹어 치우더라~!

잠시 휴식을 하며 산새들과 먹거리 나누기를 끝내고 예봉산으로 가는 급경사 위험지대에 설치한 나무테크 덕분에 초입은 그런대로 안전하게 하산을 하였다.

허나 전망 좋은 소나무 전망대를 벗어나자 급경사 바위지대는 아무런 안전장치도 되어 있지않았다.

안전장치가 없는 이곳 바위지대는 간밤에 내린 많은 적설량이 꽁꽁 얼어붙어 있어서 네발로 기어서 내려왔다.

내려오며 힐끗 바라 본 송천리 아래길은 아찔한 공포감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암벽지대를 내려서서부터는 평탄한 오름과 내림길을 걸으며 잠깐씩 좌우로 열리는 전망을 감상했다. 멀리 마루금으로 보이는 능선은 장락산과 봉미산, 그리고 통방산 산줄기가 조망되고 있었다.

또 온길을 뒤돌아보니 운길산이 보이고 오른쪽 아래로는 두물머리의 풍광이 나무가지 사이로 보인다.

고도를 낮출수록 이상하게도 쌓여있는 눈은 무릅이상이다. 아마도 이곳은 바람이 멈추었다 가는 곳인가 보다. 때문에 산행속도가 예상밖으로 상당히 지연되고 있었다. 그리고 눈 위를 자세히 보니 맷돼지들의 발자국이 여기저기 즐비하게 보인다.

오거리 안부에서 첫 젊은 산객을 만났다. 예봉산에서 오는 길인데.. 내가 지나온 운길산으로 간다고 하였다. 서로 안전산행을 하라는 작별의 안부인사를 나누고 그는 운길산으로.. 나는 예봉산으로 출발을 하였다.

사실 오거리 안부에서 오리지날 종주코스는 새재고개가 있는 오른쪽으로 갔다가 돌아와야하는데, 나는 지름길을 선택하여 새우젖고개로 바로 향하였다. 젊은 날 같으면 어림도 없는 수작인데..나이 앞에서는 어쩔 수 없나보다.

새우젖고개로 가는 길에 잠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아직까지 하늘은 더 없이 청명하지만 멀지 않은 시간에 분명 흐려질 조짐이다. 이것을 예감하는 것은 경험에 의한 옛 선인들의 [관천망기]에 해당되는데, 진정한 산꾼은 이런 정도의 날씨 예측을 할 줄 알아야 장거리 산행을 안전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것이다.

송전탑이 있는 이곳이 새우젖고개마루이다. 남양주시 지명의 역사에 의하면 조선시대까지 인천앞바다에서 잡은 새우젖을 이 고개를 통하여 내륙지방으로 운송하였다고 해서 새우젖고개라 명명했다고 한다.

새우젖고개를 지나 전망이 좋은 봉우리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날씨가 얼마나 추운지 배낭속에 있던 생수병이 살얼음이 되어 있었고, 보온에 엄청 신경을 쓰는데도 디카는 얼어서 작동 불능상태가 된다. 그럴때마다 밧데리를 꺼내어 손으로 1분정도 덥혀서 촬영을 해야만 했다.

운길산과 두물머리 철교가 정면으로 바라 보인다.

소나무 사이로 한강과 덕소도 바로 눈아래에 있다.

적갑산 직전에 본 내가 지나온 운길산줄기이다.

철죽동산을 지나다 만난 무슨 사연이 있을 법한 나무 한 그루..

적갑산(560m)이다. 힘든 경사길을 올라온 탓에 잠시 쉬었다. 먼저 쉬고 있던 산님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산님이 가져온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삼각김밥 하나를 얻어서 염치없이 먹었다. 물론 지상에서 가장 맛있게..^^ 사실 오늘 나는 빵 2개와 영양갱 2개만으로 산행 중이였으므로 커피와 김밥은 꿀맛이였다.

고마운 산님과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기로하고 적갑산을 출발하여 철문봉으로 향하며 하늘을 보니 하늘은 흐려지고 있었고, 저기 운길산쪽은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예전과 전혀 다른 철문봉은 왼 풍향계가 펄럭이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활공장이였다. 새처럼 창공을 날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낸 행그라이더, 또는 패러글라이더들의 훈련장이였다.

활공장 덕분에 철문봉은 산꾼들에게 최고의 전망대을 선사하고 있었다. 흐린날씨가 아니라면 구비치는 한강과 서울의 아름다운 전경을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어 시원스럽겠다.

활공장에서 바라 본 겨울산이 보여주는 진정한 또 하나의 아름다운 몸매..^^

철문봉(喆文峰)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는 입간판이다.

철문봉을 지나 예봉산으로 가는 안부의 군헬기장은 억새밭으로 변모해 있었다. 그리고 등산객들을 위하여 비닐하우스의 간이 쉼터도 있었다. 내부를 살펴보니 겨울철은 장사를 하지 않는 것 같다.
날씨는 점점 수상해 지더니 마침내 예상대로 가는 눈발을 흩날리기 시작하였다.
예봉산(禮峯山)은 높이는 683.2m로, 능선길로 1.5km 정도 떨어져 적갑산과 마주보고 이어져 있다. 인근 주민 들은 사랑산이라고 불러왔고,옛 문헌에는 예빈산(禮賓山),예봉산(禮蜂山)으로 기록되어 있던 것이 조선총독부 [조선지지자료]에 예봉산(禮峯山)으로 나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일제강점기에 오늘의 이름이 된 것으로 추측 된다. 옛날에는 수림이 울창하여 조선시대 때는 인근과 서울에 땔감을 대주던 연료공급지였다고 한다.

그리고 [예봉산]의 유래는 그 옛날 영서지방을 오가던 길손들이 삼각산이 보이는 이곳에서 임금에게 예를 갖추었다고 하여 유래된 산이 예봉산(禮峯山)이라고 한다. 삼각점에 인증샷을 하고..^^
예봉산에서 바라 본 오늘 내가 걸어 온 운길산의 능선들이다. 가느다란 눈발이 흐느적거리며 내리고 있다.

예봉산 산새들도 예외없이 내가 간식으로 크레카를 먹고 있었더니 옆으로 닥아 와서 애원을 하기에 나누어 먹었다. 녀석들이 사람들의 손길에 완전히 길들어져 있는게 왼지 반갑고 기쁜일로만 생각되지 않는다.
어느쪽으로 하산을 할지 잠시 고민을 하였다. 정면으로 내려가는 빠른길은 암능바위길이고, 좌측 능선길은 돌아가는 길이다. 눈길이라 좌측으로 갈려고 했는데, 발자국을 보니 암능길로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내려간 흔적이 있기에 나도 그 길을 선택하였다.

내려오며 보니 암능길은 안전나무테크를 위험구간마다 설치되어 있어서 이쪽을 선택한 것이 쉽게 하산하는 길이였다. 또 중간에 설치된 전망대는 예봉산 최고의 전망대였다.
흐린 눈발이 휘날리는 한강 건너편은 검단산이다.
초겨울의 살벌한 강추위를 조금은 부드럽게 해 주는 어느집 감나무 풍경이 아름다운 팔당리 날머리에 도착하였다. 영하 10도 이하의 강추위와 많은 적설량이 쌓여 있는 눈길을 헤치고 약 15km의 적설산행을 약 8시간으로 마무리 하였다.
참~! 오늘 산행은 나의 겨울철(강추위와 많은 적설량)산행 감각을 테스트해 보기 위한 산행이였으므로 산행내내 스틱과 아이젠을 사용하지 않았다. 한번도 넘어지기나 무릅의 통증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아직 나의 건강과 산행실력은 녹쓸지 않아서 기쁘다.
날씨 덕분에 편안하게 팔땅역에서 중앙선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어제 눈이 많이 오고.. 오늘 강추위라 나들이객들이나 등산객들이 없어서 전철은 텅텅 비어있어서 널널하게 앉아서 올 수 있었다는 야그이다..^^
2012/12/08 - 휘뚜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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