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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스크랩] 오진국의 디지털아트의 작품들..

by 휘뚜루50 2018. 7. 10.

▒ 오진국의 디지털아트의 작품들..


 

▒ Wind & woman (바람과 여인-2)

2011 Digilog Artworks (3375) Image size 9,000 x 5,000 Pixels (128.7M) Resolution 300dpi.

 

'디지털아트-크로스미디어'란 이런 것이다.

사진과 그림이 혼용된 이 작품은 그림으로써 나타낼 수 없는, 또 사진만으로는 죽어도 나타낼 수 없는

'미디어'의 혼합, 즉 혼합재료로서의 '믹스드미디어' 효과를 극대화한 본보기라 할 수 있다.
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대립적이고 극단적인 두 그룹에 감히 제언한다.


나만의 것이 최고라고 자부하는, 관습과 편견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지려면 낡은 틀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새로운 창조기법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이다. 사진을 회화에 접목시키는 일을 누군가는 해보지 않았을까마는 평면작품인 회화에서의

요건은 단순한 기교로 되지 않는, 회화적 요소가 필수이기에 늘 나는 그런 결격요소에 안타까워 하였다. 사진 하는 사람일

수록 더욱 미술기초를 습득해야 하고 그림그리는 사람도 사진을 더욱 심도있게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그러하다.

 

요즘은 대학이나 아카데미에서의 강의 관계로 '카리큘럼'을 짜고. 교육과정에 대한 보다 폭 넓은 대화를 전문가들과 자주 상의

한다. 나의 주장은 앞서와 마찬가지로 대단히 명약관화 하다. '포토샵'이건, 디지털영상의 '스위시'나 '맥스'건, 디지털 사진이건

나는 언제나 기초를 중시하고 '테크닉' 위주의 기능을 가르치는 것에 쌍수를 들어 반대한다. 그런 기능은 다른 데 가서 배우면

되고 창작을 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미적 감각을 일깨우고 부단한 노력으로 기초를 튼튼히 쌓는 일이 더 급선무라는

것을..


아무튼 엉터리 예술가의 난립을 막는 일도 창작 못지 않게 중요하므로 나는 뜻있는 몇몇 분의 조력을 받아 BASIC에 더욱

박차를 가할 생각이다. 심지어는 사진이나 동영상을 하는 사람마저도 죄다 기본기를 교육시키려 한다. 뿌리가 튼튼해야

사상누각이 되지 않을 것은 너무나 자명하기에.........

 

 

2016/07/02 - 휘뚜루 -

바람 / 김정미



▒ Falling flowers (落花-2)

2011 Digilog Artworks (3374) Image size 9,000 x 6,885 Pixels (177.3M) Resolution 300dpi.


花無十日紅이랬다.
어디 꽃의 생명만 그럴까 마는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그 수명이 유한하고 세상 이치 또한 그렇다. 權不十年이 그렇고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들에서 보듯이 십진법 숫자체계를 가진 인류의 공통점이 하나의 시간적 구간을 그리 구분하여 부르는 모양

이다. 다음은 3년 전에 내가 그렸던 <꽃의 울음>이라는 작품의 단상인데 아마도 이번에 내가 그린 낙화에 대한 느낌과 대단히

흡사했다는 점에서 여과없이 발췌하여 올린다.


꽃은 왜 우는가..?
아니 꽃이 과연 울기라도 하는가..?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분명히 꽃도 운다. 이런 가설은 깊지 못 한 나의 지식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세계적인 '사이언스' 잡지

Nature에 실린 석학들의 연구결과에 근거한다. 꽃을 포함한 모든 식물들도 나름대로의 고통(Pain)에 민감한 반응을 한다는

것이다. 가령 나뭇가지를 잘라 내었을 때, 나무는 몹시 고통을 느끼고 상처부위에 진액을 분출하여 외부로부터의 침입으로

부터 방어적 자세로 전환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의 경우 울음에 해당하는 음파가 발생하고 생체리듬에 엄청난 변화가

증폭된다는 것이다.


꽃이라고 그러하지 않겠는가..?
추워서 울고, 뜨거워서 울고, 목말라 울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파랑나비가 그리워서도 운다. 파릇한 젊음이 만개하였다가

시들어지고 말라 비틀어지면 피빛 울음을 울고 석양의 하늘을 보며 절규도 한다. 다만 우리가 모를 뿐이다. 안으로 삼키는

울음이 얼마나 많은데 사람들은 소리내어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야 우는 줄 안다. 정작 너무나 큰 슬픔은 울음조타 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은 실체가 아닌 양, 그저 무심히 스쳐 지나가기 일쑤다.


아프다는 소리가 안 들리니 꽃대를 가위로 삭뚝삭뚝 잘라내고 한참이나 더 피어있을 꽃들을 일주일 즐기자고 화병에 꽂아

두고 그것이 무슨 기품인 양, 속빈 강정같은 우아를 뜬다. 눈여겨 자세히 들여다 보면 살아있지 않은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바위나 돌도 아주 미세하고 느린 분자의 움직임이 있다니 세상에 무생물은 존재하지 않는 것임에도 눈으로

측정되는 움직임이 없는 물체를 일컬어 무생물이라 치부하고 함부로 한다. 세상에는 함부로 대해도 좋을 대상은 어디에도

없다. 또 그럴 권리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 Early in the morning-3

2011 Digilog Artworks (3371) Image size 9,000 x 6,000 Pixels (154.5M) Resolution 300dpi.


1970년대 시 발표작 중에 유난히 돋보이는 시인 박남수씨를 회상한다.
예술가란 티없는 구슬을 깎아 다른 하나의 세계를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훌륭한 표현만이 예술가의 특권이라 말할 수 있으며

전달에 그치는 예술이란 사실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훌륭한 표현이란 짧고 비약적인 함축있는 언어로 자기가 의욕한 세계를

틈없이 그려내는 것이라고 정의한 이효석씨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박남수는 시의 예술성에 대해 투철한 인식을 가진

시인임에 틀림이 없다.


아침이미지
                                   시/박남수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
아침이면
어둠은 온갖 물상(物象)을 돌려 주지만
스스로는 땅 위에 굴복(屈服)한다.
무거운 어깨를 털고
물상들은 몸을 움직이어
노동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즐거운 지상(地上)의 잔치에
금(金)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은 개벽(開闢)을 한다.



▒ Noon´s nap  (낮잠-2)

2011 Digilog Artworks (3370) Image size 6,000 x 4,992 Pixels (85.7M) Resolution 300dpi.


가끔은 그림이 주는 느낌이 코믹한 것도 분위기를 '업'시키는데 한 몫을 하니 어떤 것이 좋다, 나쁘다는 가늠을 하기 어렵지만

아무튼 대단히 가벼운 마음으로 이 작품을 마쳤다. 늘상 먹던 한정식 메뉴를 바꿔서 오랜만에 '스파게티'를 시킨 것처럼.....
낮잠을 뜻하는 오수(午睡)는 평온함의 대명사처럼 한없이 여유롭다. 더구나 신경이 과민한 사람은 밤에도 뒤척이며 제대로

잠을 설치는데 한가롭게 낮잠이 오겠는가..? 그래서 오수는 평화스러운 축복이자 생체 '리듬'의 활력소다. 졸음이 온다는
것은 잠시 쉬라는 대뇌의 명령이고 혈행(血行)의 순환을 무리하게 운용하지 말라는 신호다.
그래서 잠시 3분간 눈을 붙인 오수가 꿀맛보다 달고 극도로 컨디션을 상승시키는 것이다.


누가 그걸 모를까..?
알고도 못 자는 사람, 나같은 사람은 여유롭지 못 하다는 반증이다. 언제나 피아노의 현(鉉)처럼 팽팽하게 긴장되어 사는 나같은

사람은 눈이 시뻘겋게 충만하여 작업을 하면서도 졸음과 싸운다. 그냥 5분쯤 눈을 붙여도 아무 지장이 없는데도 거칠게 반응하며
이겨내려 한다. 그게 병신짓이다. 그러다가 신체의 기능이 한계에 부딪치면 나도 모르게 책상에 머리를 부딪칠만큼 쿵 떨어진다.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려보면 '아,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하고 자책한다. 사람이나 기계나 한계수명이 있고 금속도 피로도가

있는데 그렇게 무리한 운행을 해서야....... 사모아 같은 검푸른 바닷가, 어느 그늘에서 30시간 정도만 잤으면 좋겠다.



▒ Sketch-6 Kongduk-dong  (공덕동 풍경-6)

2011 Digilog Artworks (3369) Image size 5,508 x 3,863 Pixels (60.9M) Resolution 300dpi.



얼마 전, 일주일에 두 번 나의 작업장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하러 온 사람들과 꼭 같이 나도 수채화 작업을 하였다. 나의 작업장

에서 한 층을 더 올라가 24층 옥상에서 서울 시가지를 둘러보며 수채화를 시작하였는데 내가 그들에게 말 할 수 있는 것들,
그리고 강조하고 싶은 것을 솔선수범하여 보여주는 것이 제일 효과적일 것 같아서 나도 스켓치북을 펴고 여느 학생들과

꼭 같은 작업을 하였다.


실로 오랜만에 야외(?)에서 눈으로 보고 스켓치 하며 붓놀림하는 재미란 가을하늘처럼 상큼하고 싱그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사무실로 돌아와서 자신이 그린 작품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컴퓨터로 옮기고 디지털 작업을 하는 수순이었는데 내가 가르

치고 있는 이 '디지로그'(Digital+Analog) 작업의 우수성에 후학들은 연신 감탄을 연발하였다.
수채화와 디지털의 만남이 이런 효과를 나타낼 줄 과연 짐작이라도 했겠는가 말이다.


디지털이건 아날로그건 미술에서는 그저 단순한 표현의 도구일 뿐이다. 파블로 피카소나 칸딘스키, 마티스같은 세계적 거장이

살아 생전 이런 디지털 기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더 훌륭한 명작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을까..? 고정관념에 묶여서

편협된 시각으로 자신의 것만 최선인 줄 아는 화단의 작가들이 안타깝기 그지 없다. 창작에 Rule이 있으면 스스로 유폐됨을

그들도 알텐데 말이다.



▒ Collision of culture  (문화의 충돌-2)

2011 Digilog Artworks (3368) Image size 8,000 x 6,000 Pixels (137.3M) Resolution 300dpi.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구성하고 있는 환경에 익숙한 관계로 이질적 요소에 대한 저항이 격렬하고 급기야는 집단화 하여 자신이

기반으로 하는 문화를 보호하기에 안간 힘을 쓰게 된다. 때로는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지역의 대표성을 자임하며....


세계가 '글로벌'하게 급변하고 단일민족이라는 자긍심이 전혀 돋보이지 않는 폐쇄로 낙인받는 시대에서 문화의 접목과 교류는

어떤 물리력으로도 제어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인터넷'으로 전 세계가 열린 마당에 '우리끼리'라는 촌스런 발상으로

어찌 국제화에 부응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좋은 문화는 알리고 남의 문화도 좋은 것은 취사선별하여 받아들이는 자세가

또한 다른 의미의 국가경쟁력이다.


가끔 교외로 나가면 경치가 좋은 관광지로 향하는 길목에 수없이 늘어서 있는 각종 음식점 간판을 보게 된다.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찾는 메뉴- 순두부, 삼겹살, 매운탕, 막국수, 순대, 김치찌개, 청국장, 토종닭 백숙......그게 우리네 먹거리니 누가

뭐라겠는가..? 십리를 가도, 백리를 가도 외국인을 배려한 식당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다. 내가 미국인이라면, 또

인도인이라면, 남미에서 온 또 다른 외국인이라면 먹을 것이 하나도 없다. 한국에 왔으면 싫건 좋건 한국음식을 먹어라..?

그런 억지가 어디에 있는가..? 그런 것은 강요될 성격이 전혀 아닌, 배려의 부족일 뿐이다. 식당이 100개 정도 즐비하면

두 세군데는 외국인도 먹을 수 있는 그런 '레스트랑'도 있어야 관광객도 불편하지 않는 것이고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는

자세가 아닐까..?



▒ a delight keyboard  (환희의 건반)

2011 Digilog Artworks (3367) Image size 11,811 x 7,701 Pixels (260.2M) Resolution 300dpi.



기계적 특성으로 오르간의 건반 66개와 달리 보통 피아노의 건반의 수는 대개 88개로 이는 옥타브의 수로 건반의 수를 결정

하기 때문인데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음의 한계, 즉 가청 범위 내의 음역인 20hz~ 20,000hz 내의 소리를 재현하는 것을 목적

으로 설계되는데 귀에 손상이 거의 가지 않는 음역을 다룬 것이 특징이다.  현을 때려서 소리를 내는 피아노는 덩치도 클 뿐

더러 고급목재로 만들어진 덕분에 대단히 습도에 민감하고 보존이 까다롭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좋은, 악기는 그 자체가 시각적으로도 예술품이다. 수 천년간 진화를 거듭해 오면서 악기는 기능과

디자인이 보다 효율적으로 날로 변모하여 오늘날 악기는 인류가 만들어낸 독창적인 문화의 산물이다. 시각영역을 거점으로

하는 미술에서는 절대 다루지 못 하는, 음악이 존재한다는 것이 정말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냥 바라보기만 하여도 흥분을 느끼고 가끔 전율을 일으키는 악기들을 대하면서 환타지를 느낀다면 다소 '오버'한 표현이라

말할지 모르나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유난히 나의 그림에는 악기가 많이 등장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건반이다. 검정과 흰색의 강한 무채색 대비가 대단히 '심플'하고 '다이나믹'한데다 영어를 사용해 죄송하지만 아주
'오프티칼'한 것이 '그래픽'적 요소가 가미되어 신선감을 더하기 때문이다.



▒ Traces of passengers (행인들의 흔적-2)

2011 Digilog Artworks (3365) Image size 16,000 x 6,000 Pixels (274.7M) Resolution 300dpi.



물론 영어로는 marks, vestiges, 혹은 signs나 indication등이 다 그런 의미로 사용되지만 형상에 있어 어떤 모습의 자취를

나타내는 뜻으로 가장 적절한 표현이 바로 이 Traces이다. 우리는 지난 일에 대한, 또는 지나간 사람의 행적을 이 흔적을

통하여 유추할 수 있으며 흔적을 발견하였을 때, 바로소 어떤 현상이나 실체가 지나간 후이기 때문에 상상의 재미를 더할

뿐더러 세포가 분열하듯 작가로서는 '스토리텔링'이 가속화되는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그것도 흔적에 관한 이야기다. 세상에 태어났으면 반드시 흔적을 남겨

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능하다면 그 편이 낫다. 그렇다고 소시민이 무슨 재주로, 무슨 흔적을 만든단 말인가? 사고라도 크게

쳐서 신문에대문짝만하게 기사의 흔적을 남길 수도 없고 어쩌라고? 아니면??? 말이야 간단하지만 사실 드넓은 세상을 향하여

손톱 자국 하나 내는 것도 그리 녹녹치 않은 것이 또 이 흔적이다. 좋은 쪽이건 나쁜 쪽이건 정점에 가까워야 비로소

희미하나마 흔적이 남는 것을 보면 세상살이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 수 있다.


멀리, 그리고 너무 깊이 비약하여 생각치 말고 단순하고 심플하게 생각하자. 세상에 발자욱을 남기지 못 한다면 사랑하는 사람

이나 가장 가까운 가족, 또는 소속된 작은 집단에서라도 진정성과 선명성을 각인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면 안 된다. 언젠가

자신이 죽고 나서 주변인이 진정으로 아쉬운 통곡을 받을만큼 나는 헌신적이고 아름다운 사람이었을까..?


혹여 나 살기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주변을 죄다 외면하고 자신만을 위하여 살지는 않았을까..?
병신이 따로 없지, 그렇게라도 잘(?) 살아서 타인들에게 불쾌한 흔적이라도 남기려고..?????
작은 내 마음을 고치면 가족이 밝아지고, 가족이 밝아지면 사회, 국가도 밝아지는 법이다.



▒ Elegant morning (청아한 아침을 열며-2)

2011 Digilog Artworks (3364) Image size 9,000 x 6,804 Pixels (175.2M) Resolution 300dpi.


아침을 연다는 것, 그것도 한 주나 한 달, 또는 한해의 아침을 연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멀리 내다보지 않더라도 하루을 시작

하는 아침이 덜컹거리거나 삐걱거리고 가시덤불처럼 얽혀 출발을 하면 무슨 좋은 일이 생기겠는가? 웃음이 복을 가져다 주고,

가화만사성이라고 시작을 밝고 맑게 가져가야 함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쇄락하고 청아한 아침을 맞으면 체내에 독소가 다 씻겨나간듯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고 바로 그 사심없는 비움이야말로 새로운

전환점을 창출하는 계기가 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아침은 연속되는 삶의 시간표를 작은 단위로 쪼개서 다시 영양소를 공급

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이다.


마음이 맑아야 눈이 맑아지고 사물도 맑고 밝게 보이는 법이다. 사실, 매일 맞는 아침이라고 무슨 상황의 변동이 있을 것이며

어제와 다른, 무슨 뾰죽한 '조우커카드'가 되겠는가? 대개는 그리 생각하지만 (나도 예전에는 그랬었다) 절대 그렇지 않다.

아무리 고뇌의 늪에 빠져도 누군가의 조력이 있다면 해결할 방도가 없는 것도 아니다. 바로 그런 누군가의 외부적 도움,
그것이 인간이든 하나님이나 부처님이든 그런 일도 아무에게나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데 나 역시도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다.


좋은 마음을 가지고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일을 솔선수범하고........그런 내공이 쌓이면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남의 눈에 보이게

되는 법이다. 적어도 얄팍한 계산적 행동이 아니라면 말이다. 바로 그것이 파장이다. 좋은 파장을 가급적 많이 보내야 하는

것이다. 좋은 아침은 내가 열지만 그것 자체도 이웃에 좋은 파장을 많이 보내는 것이고 사회를 밝게 만드는 건강한
'에너지'임을 잊어선 안 된다.



▒ Thinking meditation in front of the wall/面壁小考(면벽소고-2)

2011 Digilog Artworks (3363) Image size 10,000 x 5,892 Pixels (168.6M) Resolution 300dpi.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비단 불교신자만이 아니라 벽을 마주하고 참선의 시간을 가지는 일이 허다해진다. 물론 승려들처럼

전문적인 면벽수련을 하지는 못 하지만 적어도 그렇게 벽이라도 향하여 마음을 가다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참담한

상황은 인생 길목에 도처에 깔려있어 면벽수도의 방법은 그러한 '슬럼프'를 슬기롭게 비켜가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30cm도 안 되는 눈 앞의 벽을 바라보고 앉았을 때, 참담한 현실의 좌절감은 더욱 증폭되고 한갖 미물에 불과한 자신의 초라함

에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적어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무저항의 형상을 느끼면 축 늘어진 빨랫줄처럼

육신도 마음도 천근만근이 되어 신경체계도 통제불능이 되고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오랏줄처럼 칭칭 감긴 온갖 현실의
악재들로부터 자력으로는 도저히 탈출이 불가능한, 덫에 걸린 생쥐처럼 눈만 초롱초롱해지는 절박한 현실이

인생항로에 몇 번이나 있지 않던가..?


싫다고 외면해도 비켜가는 바람 없다'고 모질고 황량한 들판에 혼자 서보라. 면벽도 사치지, 갈가리 찢긴 영혼을 꿰맬 재간도

없는, 그런 참담한 상황을 가끔 되돌아보는 것도 느슨한 마음을 조여주는 보약이 된다. 재수가 없어 그렇지 내가 언제 그런

고생을 했다고, 송두리채 망각하고 또 다시 현실에 안주하다 보면 복병은 도처에서 혀를 날름거리게 된다.


'무심코 던진 돌맹이에 개구리는 생사가 걸렸다'고 하지 않던가..? 나는 아직도 장난이나마 돌맹이를 던지는 소년이 아니라

개구리이기에 오늘도 노심초사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래서 경상도 방언으로는 '단디이 해라'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매사에 조심하고 잘 처신해서 대과없이 잘 마무리 해라'라는 복잡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2016/07/02 - 휘뚜루 -


출처 : 산으로, 그리고 또 산으로..
글쓴이 : 휘뚜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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