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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산행기

소양강(昭陽江)의 오지(奧地)마을 오항리(吾項里)와 추전리(楸田里) 트레킹..

by 휘뚜루50 2022. 3. 1.

Wisdom & Compassion / Nawang Khechog(클릭하여 듣기)

▒ 소양강(昭陽江)의 오지(奧地)마을 오항리(吾項里)와 추전리(楸田里) 트레킹..

    2022/02/25 - 금요일 -

 

춘천(春川)의 우리말은 ‘봄내’다.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시냇물 소리는 겨울이 풀리는 새봄 소식, 
새 생명의 부활을 알리는 땅 속 함성이다. 유안진 시인의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가 아니더라도 
‘얼음 풀리는 냇가에 새파란 움미나리 발돋움 하고, 쌓인 낙엽 밑에는 봄나물 꽃다지 노랑웃음’
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곳..

 

물안개 속 물깨말에 살면 누구라도 시인이 될 것 같은 곳, 팍팍한 일상에서 언제든 훌쩍 떠밀려가 

안기고픈 마음속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곳이 어딘가에 있다는 건 축복이다. 댐이 생기고 지형이 

달라져 옛 정취를 맛볼 수는 없지만, 아직도 숨어있는 옛길을 불러내면 연두빛 봄기운이 

핏속까지 스며들 것 같은 곳이 춘천이다.

 

짙푸른 소양호를 발아래 거느리고 자연 속으로 풍덩 빠져들 수 있는 길.. 산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버들가지 움트는 소리에 나를 잊고 봄이 될 수 있는 길이 소양호 끝자락 추전리 명상의 길이다.

 

명상의 길 추전리(楸田里)를 내가 처음 접한 것은 오래전에 읽었던 이외수의 소설 '장수하늘소'와 
전상국의 소설 '소양강 처녀'를 읽으며 알게 된 지명이였다. 추전리는 예전엔 큰 마을로 양구가던 
길목이었으나 댐으로 수몰되고 산 위편에 지금은 농가 3채만 달랑 남은 곳이 되었다.

 

소양강 오지 중에서도 끄트머리에 해당하는 추전리(楸田里)로 가기 위해서 춘천 중앙시장에서 

08시 20분에 출발하는 오항리행 버스를 타야 한다. 그래서 조금 편하고 빠른 ITX-청춘열차를

06시에 용산역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갔다. 백양리역을 지나며 바라본 북한강 풍경..

 

06시에 용산역을 출발한 ITX-청춘열차는 07시 15분에 춘천역에 도착하였다. 이렇게 오항리행

버스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도착한 것은 춘천역에서 직선거리로 약 500m 앞쪽 사거리에 있는

'광치해장국집'에서 아침밥으로 선지해장국을 먹기 위해서이다.

 

'광치해장국집'은 아침 06시 30분부터 운영하는 집으로 이쪽 방면의 산행을 할 때

몇 번 아침식사를했던 집이라 믿고 찾는 맛집이다. 

 

'광치해장국집' 메뉴는 선지해장국과 우거지해장국, 그리고 콩나물해장국 3가지만 판매하는 해장국

전문집이다. 맛이야 전문해장국집 답게 고유의 전통 해장국 맛을 살려 단백하고 깔끔한 맛이다.

가격 또한 1인분 오천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이라 한마디로 가성비가 좋은 집이다. 

 

맛있는 아침식사를 끝내고 오항리행(북산1) 버스는 해장국집에서 100m 정도 떠어져 있는 춘천농협 

버스정거장에서 08시 30분쯤에 승차를 했다. 이 오항리행(북산1) 버스는 신북읍과 추곡약수터까지

여기저기 들렸다가 북산면을 지나 오항리 종점에 9시 20분경에 도착하였다.

 

오항리(吾項里)는 소양강 댐이 완공되고 한 때는 소양강댐에서 정규 뱃길도 있었으나 몇년전에 육로

정규 버스노선(춘천에서 오항리까지)이 개설되면서 지금은 뱃길은 운항되지 않고 있는 오지마을이다.

 

오항리 마을의 전체적인 지형이 다람쥐의 목처럼 생겼다는데서 유래했으며, 한자는 나 오(吾)자를

쓰지만 다람쥐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오항리(吾項里) 배터마을에 있는 오래된 고목나무의 전경..

 

오항리(吾項里) 마을버스 종점에서 도로가 끝나는 지점의 추전리까지는 약 3,2km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5km쯤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소양강댐이 완공되고 산허리를 깍아 만든 길이였다. 

 

추전리(楸田里)로 가다 잠시 뒤돌아 바라본 오항리(吾項里) 뱃터마을 전경..

 

소양강댐 건설로 육지 안의 섬이 되어버린 추전리로 가는 길..

 

소양강댐 건설로 원래의 길은 수몰되고 산허리를 깍아 만든 임도 수준의 길이지만

승용차가 다니기에는 큰 불편은 없는 포장과 비포장 구간이 공존하는 도로이다.

 

2월 말의 봄 기지개를 펴고 있는 소양호의 풍경.. 

 

소양호 물길따라 구비구비 돌고돌아 가는 추전리(楸田里)로 가는 길..

 

소양호 건너편 610m봉은 춘천시 동면 조교리 방향이다.

 

가로길 옆으로는 온통 개복숭아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그리고 지난해 열렸던 개복숭아 열매가 길바닥에 널부러져 있다.

 

추곡리로 가는 길옆에 콘테이너 박스로 설치한 가건물이 있다. 나중에 인터넷으로

조사를 해 보았더니 2020년 5월 28일에 사망사건이 발생한 건물이였다.

 

2020년 05월 28일 오전 8시 22분께 강원 춘천시 북산면 추전리 이 주택에서 일산화탄소 
중독 추정 사고가 발생하여 홍천소방서 소속 소방관 2명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홍천소방서 소속 소방관 8명은 27일 친목 도모를 위해 동료 소방관 아버지의 간이 컨테이너 황토방

에서 잠을 자다 일산화 탄소중독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리고보니 집을 지를 위치도 아닌 곳에

억지로 가건물을 지었다가 귀중한 생명을 잃어버리게 한 것 같다.

 

다시 추전리(楸田里)로 가는 산길을 따라 구비구비 돌아가다보니 물 빛과 하늘 빛 사이의

몽환적인 소양호 너머로 춘천시 동면 조교리쪽에 있는 바위산이 조망되고 있었다.

 

줌으로 최대한 당겨본 흐릿한 실루엣의 바위산 전경..바위산은 조교리쪽에서 여러번 다여온 산이다.

글자 그대로 능선길은 정비되지 않는 날카로운 암릉의 릿지길로 되어있어 초보산행은 금지산이다.

 

맑은 날씨면 610m봉 좌측 뒤로 홍천의 가리산이 조망될터인데..

그리고 앞의 300m봉은 소양강댐이 만수일 때는 섬이되는 산이다.

 

추전리 마을에 도착하였다. 추전리는 소양호에 의해 영역이 남북으로 분리되어있다. 북쪽 지역에는 

거주하는 주민 없이 양구방향으로 가는 구도로와 일부 소규모 경작지만이 존재하며, 남쪽지역에는 

오항리 버스종점에서도 비포장도로로 약 5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소수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또한 추전리(楸田里)는 추곡리와 사전리(沙田里, 소양강가의 모래밭 마을)가 병합되면서 생긴 
지명인데, 이 사전리는 조선시대 광해군 때 ‘칠서의 난’으로 역사를 바꾸었던 무륜당의 산채가 
있었던 곳. 1934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윤백남의 ‘흑두건’은 역사 속의 이곳을 담고 있다. 

 

허균의 ‘홍길동’ 모티브가 되었던 이 사건은 잘 알려진 서양갑, 박응서 외에 당시 춘천부사의 
아우였던 심우영도 등장한다. 그리고 추전리(楸田里)는 개오동나무 추(楸)자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개오동나무가 지금도 많이 서식하고 있었다.

추전리 맨 위에 있는 계단식 밭이다. 현재 경작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추전리(楸田里)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1호집..주민이 외출을 했는지 인기척이 없다.

 

1호집 입구 전경..

 

2호집 전경..이 집도 인기척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외출중이거나 주말만 이용하는 집인듯..

 

3호집..이 집은 분명히 사람이 살고 있고, 멍멍이도 낮선 나를보고 요란벅적지근하게 짖어대지만

밖으로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좀 물어 볼 것도 있었는데 사람들을 대면할 수 없으니..

 

길이 끝나는 곳까지 따라 가 보기로 하였다.

 

몽환적인 소양강 건너편 300m봉과 610m봉 전경..

 

바위산 전경..

 

뒤돌아 바라본 2호집 전경..

 

길은 소양강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좌측 길은 밭으로 가는 길이고 직진하는 길은 소양강 물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곳 물속이 수몰된 추전리(楸田里) 옛 마을터인가 보다.

 

좌측 풍경..

 

정면 풍경..

 

우측 풍경..

 

파노라마로 담아본 수몰된 추전리 전경..이곳에서 망중한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오항리로 출발하다.

 

주민 총 3가구가 살고 있는 추전리(楸田里) 마을 전경..

 

잠시 이곳 주민들은 무엇으로 생계를 위지 하는지 궁금하였다. 농사를 지을 밭뙈기도 변변하지

않고, 소양강물에 의지하여 어업을 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그렇다고 산채에 의지하는 것은

더더욱 아닌 것 같았다.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여 그냥 돌아섰다.

 

노거수가 되어가는 밤나무 한 그루..

 

마지막으로 몽환적인 추전리(楸田里)의 수몰된 물 속을 바라보고 추전리(楸田里)를 떠났다.

 

다시 꼬부랑 구비길을 돌고돌아 오향리(吾項里)로 향하였다.

 

오항리로 가는 길은 대부분 소양호를 바라보며 걷는 된비알 석벽길이다.

 

왔던 길을 되돌아 가며 고민을 하였다. 길 없는 막산을 하며 보물(?) 찾기를 해 볼 것인지..?

아니면 그냥 짧지만 트레킹으로 끝내고 12시 10분 버스로 돌아 갈 것인지..?

오늘은 그냥 돌아가다 춘천호반에 있는 소양강 처녀를 만나보기로 하였다.

 

오항리(吾項里) 버스종점 부근에 있는 오래된 당산나무 전경..

 

오항리(吾項里) 버스종점에 있는 솔바람 팬션 전경..

 

오항리(吾項里) 버스종점 마을 전경..

 

오항리(吾項里) 버스종점에 있는 정자..

 

정자에서 바라본 오항리(吾項里) 뱃터 전경..

 

이곳에서 준비해간 먹거리로 이른 점심을 하였다. 버스는 약속 시간대로 왔고 12시 10분에

출발하여 약 13시쯤 소양강 처녀를 만나기 위하여 소양 2교에서 하차을 하였다.

 

소양강 처녀상을 이렇게 가까이 보기는 처음이다.

 

열여덟살 처녀 얼굴이라 하기에는 좀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상이다..^^

 

소양강 처녀 노래는 반야월이 작사하고 이호가 작곡한 대한민국의 가요이자 한국인의 대표 애창곡.. 

1970년 가수 김태희가 불러 큰 인기를 얻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앨범 10만 장 판매액을 올렸다. 

처음에는 제목을 춘천 처녀라고 하려 했으나, 어감이 더 괜찮은 소양강 처녀라고 지었다고 한다. 

노래의 배경이 된 소양강이 춘천시내를 흐르는 강이기에 춘천시를 대표하는 가요 중 하나로 꼽힌다.

 

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외로운 갈대 밭에 슬피 우는 두견새야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 너마저 몰라주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동백꽃 피고 지는 계절이 오면 돌아와 주신다고 맹서[6]하고 떠나셨죠
이렇게 기다리다 멍든 가슴에 떠나고 안 오시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달 뜨는 소양강에 조각배 띄워 사랑의 소야곡을 불러주던 님이시여
풋가슴 언저리에 아롱진 눈물 얼룩져 번져나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 반야월 작사, 이호 작곡, 김태희 노래로 클릭하여 한번 들어 보자~!

 

이 노래에 등장하는 소양강 처녀의 모델이 된 인물은 1969년 당시 가수지망생이었던 윤기순
(1953년 생)이라는 실존 인물이다. 반야월이 1990년, KBS의 전국노래자랑과 한 인터뷰에서 
소양강 처녀의 노래 모델인 윤기순 씨의 실명을 거론했다.

 

윤기순 씨는 춘천에서 서울로 상경하여 명동 근처에 있던 한국가요반세기가요작가동지회 사무
실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 7남매(2남5녀)의 맏딸으로 돈 많이 벌어서 동생들 학비나 댈 수 있
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상경을 했다. 애초에는 전화 교환원을 꿈꾸었다고 한다.

 

서울에 도착한 직후 그녀는 전화 교환원을 양성하는 통신학원에 다녔으나 전화 교환원 월급으로
가족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기 위해 한달 만에 통신학원을 
그만뒀다.

 

그리고 가수가 되면 좋아하는 노래도 할 수 있고, 돈도 많이 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무작정 
김종한 작곡사무실을 찾아갔다고 한다. 김씨는 작곡가 박시춘, 작사가 반야월 선생이 소속돼 
있는 서울 가요작가 동지회 사무실을 소개해줬고, 그녀는 가요작가 동지회에서 일하게 되었다. 
전화도 받고, 심부름도 하고, 노래도 배웠다.

 

이후 1968년 6월 어느 날 소양강 상류에서 민물고기잡이를 하는 아버지가 사는 춘천의 고향집
으로 자신이 일하던 사무실 사람들을 초청하였고, 회장인 반야월 선생을 비롯해 작사가 고명기·
류노완·월견초 선생 등 가요 작가 사무실 일행 10여 명이 초청에 응했다. 

 

이 때 얻은 시상을 반야월이 노랫말로 옮겨서, 작곡 작업과 음반 녹음 작업을 거쳐 1970년에 
발표한 노래가 "소양강 처녀"이다. 실제로도 가요작가 사무실 동지회 사람들 사이에서 윤기순 
씨의 별명이 소양강 처녀였다고 한다.

 

노래는 크게 히트했지만 정작 주인공인 윤기순 씨는 잊혔다. 1970년에 음반을 발표하기는 했지
만 별 소리 소문 없이 묻혔고, 그 이후 전국을 돌며 밤무대 가수를 했다고 한다. 혼인도 하지 
않았다. 노래를 너무 불러서 목이 상해 성대결절수술을 두 번이나 받기도 하고, 돈을 모아 
아버지께 젖소를 사드렸지만 우유 파동으로 목장이 망하는 등 상당히 험난한 삶을 살았다.

 

그렇게 잊힌 실제 소양강 처녀는 1995년 노래비를 세울 때 작사가 반야월이 직접 밝힌 뒷이야기
로 말미암아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춘천시가 경찰청의 협조로 윤기순 씨를 찾아냈을 당시 
고향을 떠나 광주에 살고 있었다. 그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서 밤무대 가수로 한동안 활동하다가,

2006년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춘천시 사북면 지암리 집다리골에서 

‘풍전가든’이란 민박을 겸하는 음식점을 경영한다

 

또 다른 소양강 처녀의 주인공으로는 1967년 3월, 당시 18세로 춘천여자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경희 씨(1950년 생)라는 얘기도 있다. 박경희 씨는 춘천시 소양1교 인근에서 호수여관
과 선박업을 운영하는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당시 반야월 선생은 이 여관에 1달 가량 머무르며 곡을 썼고, 소양강 상류 작은 섬인 고산이라는
곳을 자주 찾았다. 이때 박경희씨는 반야월을 섬까지 한두 차례 배로 데려다 줬다고 한다. 반야월
은 여관을 떠날 때, 박경희에게 “네 사연을 노랫말로 썼으니 나중에 레코드가 만들어지면 춘천에
와서 전해 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호수여관을 떠났다고 한다. 

 

반야월은 생전에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소양강 처녀는 어느 특정 인물의 얘기를 쓴 게 아니라 
소양강 인근에 살던 모든 처녀를 주제로 한 것”이라고 밝힌 사실도 있다. 박경희씨는 소양강 
처녀 노래를 자주 듣지는 않는다고 하신다. 노래를 듣게 되면 그 시절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가슴이 먹먹해진다고 하신다.

 

시기상으로도 가사를 지은 것이 두 사람을 모두 만난 후의 일이어서 두 사람 다 반야월의 작사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강원도청과 춘천시청에서는 두 사람 모두 소양강 처녀의 주인공
으로 인정한다. 춘천시에서는 온 국민에게 사랑받는 애창곡인 소양강 처녀를 기념하기 위해 

2005년, 5억 5천만 원을 들여 소양강 강변에 기념비를 세웠다.

 

잠시 잠깐 소양강 처녀도 만나보고 춘천역으로 가서 14시에 출발하는 ITX- 청춘열차를 예약하려고

하니까 매진이라고 한다. 거참 주말도 아니고 평일 낮 시간대인대 우짜 매진일까하며 일반 전철에

승차를 했다. 이런 일반 전철은 썰렁하다 못해 텅텅비어 있다. 우짜튼 나는 공짜로 편안하게

한나절의 소양강 오지인 오항리와 추전리 트레킹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 왔다.

봄꽃이 화사하게 피는 날 다시 한번 찾아야 겠다.

 

2022/03/01 - 휘뚜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