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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산행기

복계산에서 매월당 김시습(時習)을 만나고 피서를 하다.(2010/08/07 )

by 휘뚜루50 2019. 9. 3.
 

▒ 복계산에서 매월당 김시습을 만나고 피서를 하다.

- 2010/08/07 -
 



삼복중의 산행은 무더위와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한다. 그러므로 평상시의 산행과는 다른 몇가지의 원칙을
철저히 준수해야 한다. 강열한 햇볕을 받으며 산행해야 하는 코스는 피해야하고, 평소보다 산행속도를
절반 이하로 천천히 걸어야하며, 힘들면 무조건 자주 쉬고, 목이 마르기전에 자주 물을 많이 마시는
것들이 무더운 삼복중에 산행할 때 지켜야 하는 아주 기본적인 요령들이다. 그리고 산행중에
컨디션에 문제가 발생하는 일행이 있으면 무리한 산행을 하지 말고 즉시 하산을 해야한다.




그래서 선택한 산행지가 강원도 철원군과 화천군 경계에 있는 복계산으로 결정하고 한북정맥의 남한 시작점인
수피령고개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복계산 산행은 일반적으로 철원군 근남면 잠곡리 청석골을 들머리로 하는
것이 보편적 방법인데, 수피령을 들머리로 한 까땋은 그 쪽보다 쉽게 정상에 다녀 올 수 있기 때문에 선택한
코스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수피령코스는 언제 어느때나 호젖하게 산행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복계산은 민통선부근에 있는 산이라 6,25전쟁이후 군사작전지역으로 통제되어 오다가 약 십오년전에 처음
개방한 산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다른 산들에 비하여 자연환경이 아직은 대체로 잘 보존된 산이다.
그러나 내가 복계산이 개방되던 그해에 산행하며 본 복계산과 오늘의 복계산은 상당히 훼손되어
있었서 안타까웠다. 어디 인간들이 문화나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훼손하는 게 한 둘이 던가..^(^




수피령에서 복계산 산행을 가볍게 마치고 청석골의 김시습을 만나로 매월대와 매월폭포로 갔다. 주차장 들머리
길에는 햇볕은 없지만 삼복의 무더위가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찜통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매월(선암)폭포로 가는 길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저 마다의 소망을 기원한 작은 돌탑들이 있었다.
부자되기 위해서.. 건강을 기원하며.. 권력과 명예를 위해서.. 사랑과 평화를 위해서.. 아니면 가정의
화목한 행복을 위하여 그네들은 돌탑을 쌓고 또 쌓은 것이렸다. 부디 모든이의 소망이 이루어
지기를 기원하며 나도 주변에 있는 돌 하나를 주워서 돌탑위에 쌓았다.




돌탑길을 지나면 작은 폭포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은 매월폭포로 알려져 있지만, 예전에는
선암폭포라고 하였는데, 매월당 김시습의 영향으로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매월당
김시습은 어떤 사람이고 이곳 매월대와 어떤 인연을 가지고 있는지 한번 알아 보자~!





조선 초기의 대표적 방외인(方外人)으로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1435~93)의
詩 중에 竹詩 (대로)는 평소에 내가 좋아하는 詩이다.
 
竹詩 (대로) / 金時習

 此竹彼竹 化去竹(차죽피죽 화거죽)
 風打之打 浪打竹(풍타지타 낭타죽)
 飯飯粥粥 生此竹(반반죽죽 생차죽)
 是是非非 付彼竹(시시비비 부피죽)
 賓客接待 家勢竹(빈객접대 가세죽)
 市井賣買 歲月竹(시정매매 세월죽)
 萬事不如 吾心竹(만사불여 오심죽)
 然然然世 過然竹(연연연세 과연죽)

이대로 저대로 되어가는대로
바람부는대로 물결치는대로
밥이면 밥,죽이면 죽, 이대로 살아가고
옳다면 옳거니 그러면 그러려니 그렇게 아세
손님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하고
장터에서 사고 팔기는 시세대로 하세
세상 만사가 내마음대로 안되니
그렇고 그런세상 그런대로 살아가세





주벽(酒癖) 신동 매월당 김시습의 생애와 詩 ◆

먼저 매월당 김시습을 이야기 하려면 술에 관한 것부터 이야기하는게 순서일 것 같다.
술을 즐겨 마시는 애주가들에게는 작삼불문(酌三不問/술을 마시는데에 세가지를 가리지 않는 것)이 있다.
청탁불분(淸濁不問)이라 하여 한잔 술을 놓고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고,  대작불문(對酌不問)이라 하여
애주가들에게는 술 마시는 상대가 상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으며, 생사불문(生死不問)이라 하여
술맛이 좋을 때에는 죽고 사는 것을 가리지 않고 마신다는 것을 비유하여 한잔 술에 청탁불문이오,
두 잔술에 대작 불문이오, 석잔 술에 생사불문이라는 애주가들끼리 오가는 말이 있다.

진짜 애주가라면 술 마시는 법도를 따지기보다는 상하 구별이나 격의를 따질 것 없이 소탈하게 대작하며
마신다는 말이다. 아마도 역사적으로 이러한 인물을 찾아본다면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 1493)일것
이다. 그는 시를 읊되 노상 술을 퍼마시고 시를 지었다. 화전민과 같이 술을 마시면서 화전민의 고통을
노래하기도 하고, 백성과 술을 마시면서 그들이 수탈에 시달리는 모습을 시에 담아내기도 했다.
간혹 외로울 때면 홀로 자작하면서 시를 짓고 글을 썼다.




1) 신동 김시습

김시습은 강릉 김씨인 김일성의 장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증조부인 김윤주(金允柱)가 안주목사
(安州牧使)를 지낸 일 이외에 당대에는 이렇다할 재산도, 권세도 없었으며, 부친은 아무런 관직을
갖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다. 8 개 월 만에 글자를 터득했고,
세 살 때 맷돌로 보리를 가는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無雨雷聲何處動(무우뇌성하처동) / 비 내리지 않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黃雲片片四方分(황운편편사방분) / 누런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다섯 살이 되면서 시를 능히 지어 그 소문이 장안에 자자했다.
당대의 노재상 허조(許稠 1369 - 1439)를 마주한 자리에서 재상을 가리키며

老木開花心不老(노목개화심불노) / 노목에 꽃이 피니 그 마음 늙지 않았네.
라고 읊으니, 재상이 크게 감탄하며 칭찬하였다. 이러한 소문을 세종대왕이  듣고
어린 김시습을 오라하여 친히 시험해 보기로 했다.  세종대왕은 옆에 있는
산수화가 그려진 병풍을 가리키면서 시를 지으라고 했다.

小亭舟宅何人在(소정주택하인재) / 작은 정자와 배 안에는 누가 있는고
라고 다섯살 어린 김시습이 칠언율시로 답하니 세종대왕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종대왕은 이 아이가 커서 학문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크게 기용하겠다고
신하들에게 말하고 김시습을 칭찬하면서 비단 여러 필을 하사하였다.

세종대왕은 어린아이가 무거운 비단을 어떻게 가져가는가 시험해보고자 스스로 가져가라고 하니,
김시습은 비단을 풀어 매듭을 묶고 허리에 동여매어 끌면서 밖으로 나가니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고
전해온다. 그 이후로 김시습을 평하여 말할 때에는 오세신동(五歲神童)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여 오고 있다.




2. 방랑 속에 주벽(酒癖)과 시벽(詩癖)을 즐기다.

김시습은 15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3년이 채 못 되어  아버지도 중병을 앓다가 사망하였다.
이러한 가정적 역경 속에서 훈련원 도정(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의 나이 스물 한 살 때인 1455년(단종 3) 삼각산 중흥사에서 글을 읽고 있다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통곡하면서 읽고 있는 책을 모두 불살라버리고 미친 척 하기 시작했다.
그는 과거시험을 단념하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 뜻을 같이 한 아홉 사람과 함께 강원도 금화로 가서
바람소리를 벗삼아 방랑인의 삶을 살기 시작하였다.

김시습은 단종에 대한 충성을 다하기 위해 방랑 생활을 지속하였다. 방랑인 생활을 하면서 냉철하게
현실을 보고 비뚤어진 세상을 비판했다. 또 그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몸소 노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 지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에 뛰어들어 개혁사상을 실천하려 하지 못하고
비켜서서 세상을 바라보았다는 한계도 지니고 있다.

방랑생활을 하다가 중이 된 그는 성삼문 등 사육신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중의 행색으로 시체를
거두어 노량진 언덕에 묻어주었다.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다가 때로는 절에 몸을 의지해 불경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송도를 기점으로 관서지방을 유랑하여, 당시에 지은 글을 모아 24세인 1458년(세조 4)에 [탕유관서록]을
엮었는데, 그 글의 끝에 방랑을 시작한 동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하여 명리(名利)를 즐겨하지
않고 생업을 돌보지 아니하여,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다. 본디 산수를 찾아 방랑하고자
하여,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로 읊조리며 즐기기를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하였지만,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기를 생각해보지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세조의 왕위찬탈)을 당하여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를 행할 수 있는데도 몸을 깨끗이 보전하여 윤강(倫綱)을 어지럽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라고 적어 놓았다.




3. 난세(亂世)를 희롱하며.

나이 서른이 되던 해의 봄에 경주로 내려가 금오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칩거하였다.
그가 머물렀던 금오산실이 바로 지금의 용장사이다. 절이 폐허가 된 데다 골짜기가 깊어 사람의 발자취가
거의 닿지 않았다. 여기에 매화를 심었다. 그래서 그 집의 당호가 [매월당(梅月堂)]이다. 이곳에서 31살
때부터 37살에 이르는 황금기를보내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금오신화]를 비롯한
수많은 시편들을 [유금오록]에 남겼다.

그는 고관의 권신들을 꺼릴 것이 없었다. 한명회가 한강 가에 화려한 압구정을 짓고, 서강 가에 별장을 두고
이를 감탄하는 현판들을 걸어놓았다. 어느날 김시습은 한명회 별장의 현판에 쓰여져 있는 시를 바꿔놓았다.

靑春扶社稷(청춘부사직) / 젊어서는 사직을 붙잡고
白首臥江湖(백수와강호) / 늙어서는 강호에 묻힌다

이러한 한명회의 시에서 [扶]자 대신 [亡]자를,[‘臥]자 대신 [汚]자로 바꾸어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靑春亡社稷(청춘망사직) /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白首汚江湖(백수오강호) / 늙어서는 세상을 더럽힌다.

이렇게 완전히 바꿔버렸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배꼽을 잡고 웃으며 이 시를 읊었다는 일화가 있다.

1481년 47살에 돌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아들여 환속하는 듯하였으나,
아내는 죽고 원하는 아이는 얻지 못했다. 다음 시 한수에서 50세 되던 해 그의 슬픔과 회한 그리고 말년의
불우함을 읽을 수 있다.

五十已無子(오십이무자) / 나이 오십에도 자식이 없다 보니,
餘生眞可憐(여생진가련) / 남은 여생 진실로 가련하다네.
何須占泰否(하수점태비) / 어찌 앞으로의 편안함을 말할 수 있으랴
不必怨人天(불필원인천) / 그렇다고 사람과 하늘 원망해서 안 되는 것.
麗日烘窓紙(여일홍창지) / 고운 해가 창호지를 훤히 비추이니
淸塵狐坐氈(청진고좌전) / 맑은 티끌이 자리에 깔려 있다네.
殘年無可願(잔년무가원) / 남은 여생 동안 원하는 것 없으니
飮啄任吾便(음탁임오편) / 먹고 마시는 것 편한 대로 맡기리라.

그 후로 여러 곳을 방랑 하다가,  한때 양주군의 수락산 밑에 수락정사를 지어 머물기도 했다.
그가 이곳에 머물 때 술과 지필묵을 가지고 물살이 빠른 곳에 자리를 잡아 종이 일백 장을 만들어
시를 쓴 뒤 물에 떠내려보냈다. 그는 산에서 이렇게 소일하면서 종이가 다  떨어져야 하산했다.




 4. 취해도 사모하는 단종 생각.

매월당은 그의 작품 [금오신화]의 한 대목에서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즉 부벽정에서
술에 취해 노는 대목을 서술하여 놓았다. 평양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홍생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홍생이 평양으로 가서 친구들과 같이 대동강에서 놀다가 술이 취한 후 부벽루에
올랐다가 기자(箕子)의 딸을 만나 밤이 새도록 시를 주고받으며 즐거움을 나누었다. 그런데 날이
새자 그 딸은 시를 남겨두고 홀연히 하늘로 올라가 버렸고, 시(詩)마저 회오리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그 이후 홍생은 상사병을 얻어 죽게 된다. 그의 시체는 며칠이 지나도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는데,
이는 기자의 딸을 만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의 여주인공으로 기자의 딸을 등장시킨 것은
김시습이 당시 기자에 대한 한시를 많이 지은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그리고 기자가 위만에서
나라를 빼앗긴 것은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것과 유사하다. 즉 기자의 딸을 사모한 것은
단종에 대한 연모의 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후세 연구가들은 말하여 오고 있다.  김시습은 5세 때
세종으로부터 단종이 너희 임금이 될 것이다 는 말을 듣고 난 뒤, 그는 평생 단종을

정신적 지주로 생각했다.

다음으로 매월당의 음주시 한편을 감상하여 보자~!

醉鄕(취향) / 취중에 느끼는 몽롱한 경지에서

醉鄕日月亦佳哉(취향일월역가재) / 취하고 보니 해와 달이 아름다운데,
依舊狂心傑且魁(의구광심걸차괴) / 언제나 미친 마음 높고도 크다네.

身世浮游微似제(신세부유미사제) / 몸은 떠돌아 천함이 가라지 풀 같으나
乾坤濩落大於杯(건곤호낙대어배) / 하늘과 땅은 넓어 술잔보다는 크다네.

二豪侍側從敎倣(이호시측종교방) / 두 호걸을 곁에서 모시니 따르라며
千丈流胸驀地來(천장류흉맥지래) / 천길 흐르는 가슴속에 땅을 달려오네.

一斗百篇兒희耳(일두백편아희이) / 한말 술에 백 편 시 짓기는 아이 장난이니
何人會得醉鄕恢(하인회득취향회) / 취한 세상 넓은 줄을 그 누가 알기나 하랴.
 


매월당 시비에 적혀 있는 시

半輪新月上林梢(반륜신월상림초)  / 새로 돋은 반달이 나뭇가지 위에 뜨니,
山寺昏鐘第一鼓(산사혼종제일고) / 산사의 저녁종이 가장 먼저 울리네.

淸影漸移風露下(청영점이풍로하) / 달 그림자 아른아른 찬이슬에 젖는데,
一庭凉氣透窓凹(일정량기투창요) / 뜰에 찬 서늘한 기운 창 틈으로 스미네.
 
이 시비는 무량사의 부도탑이 있는 곳과는 거리가 멀다. 일주문 지나 극락교 지나
무량사로 접어드는 길 왼쪽 어귀의 옛날 버섯 재배 장 공터 뒤쪽 큰 나무 아래에 있다.
여름이면 그늘 짙은데다  비석이 검정 오석 이어서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지나는 사람들은 내용을 모르니 보고도 가까이 가려 하지 않는다.




5. 죽어서 살아난 매월당 김시습.

김시습이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충청도 홍산의 무량사(無量寺)였다. 이곳에서 59살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죽을 때 화장하지 말것을 유언하여 절옆에 시신을 안치해 두었다. 3년 후에 장사를 지내려고 관을 열어보니
안색이 생시와 같았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부처가 된 것이라 믿었다. 결국, 화장을 했는데, 사리가 나와
무량사에 부도를 만들어 안치하였다. 현재, 작자 미상인 김시습의 초상화가 무량사에 소장되어 있다.

선조의 명을 받아 율곡 이이가 지은 [김시습전]을 살펴 보면, 어느 날 서거정(徐居正)의 화려한 행차가 조정
으로 향하고 있었다. 모두 길을 비켜서는데 허름한 차림의 사내가 [강중(剛中)아, 잘 지내느냐]며 길을 가로
막고 섰다. 강중은 서거정의 자(字)였다. 무례함에 놀라 보니 바로 김시습(金時習)이다. 서거정과 김시습은
어려서 동문수학을 하던 친구 사이였다.

수행하던 벼슬아치가 벌주려 하자 서거정이 [그만 두어라. 미친 사람에게 따져 무엇하겠느냐]고 만류하며
[만약 이 사람에게 죄를 준다면 뒷날 그대 이름에 누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그 당시 실제로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조정에서 보인 역할은 대단했다. 벼슬은 대제학에 이르렀고,
개인 저술을 제외하고 국가의 요구로 편찬한 것만 해도[경국대전][삼국사절요][동국여지승람][동문선]등
수백 권에 이른다. 거기에 비하면 김시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뒷사람의 평가는 흥미롭다. [조선왕조실록]의 사관은 서거정이 죽던 날 [그릇이 좁아서
사람을 용납하지 못했고 후진을 장려해 기른 것이 없다. 이로써 세상에서 그를 작게 여겼다]고 혹평했다.
권력 독점에 대한 비판이다. 김시습은 한번도 생전에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오르지 못했지만 죽고 나서
상황이 달라지고 말았다.

선조는 김시습의 충절을 기려 생육신으로 떠받들게 하고 율곡으로 하여금 [김시습전]을 짓게 하였다.
이율곡은[김시습전]에서 김시습이 영특하고 예리한 자질로써 학문에 전념하여 공과 실천을 쌓았다면
그 업적은 한이 없었을 것이라면서 애석해하였다.

정조는 김시습에게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청간공(淸簡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서거정과 김시습은 죽어서도
엇갈린 삶을 살았다. 역사는 준엄하며 그것은 올곧게 산 자의 편이다.

매월당의 자취는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다.설악산에서부터 경주의 용장사,계룡산의 동학사,그 말사인 부여의
무량사. 그리고 서울 근처에서는 삼각산과 수락산, 그리고 강원도 철원과 금화,경기도 포천 등지에 그의 방랑
흔적이 산재하고 있으니, 삼천리 방방곡곡에 흩어진 매월당의 방랑의 자취이다.




특히 철원군 근남면 잠곡리 청석골의 격조 높은 매월대와 매월폭포는 매월당 김시습의 초기 방랑의 모티브를
제공한 곳으로, 그리고 방랑을 끝맺음한 부여 만수산 무량사와 함께 중요한 곳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매월폭포 바로 아래에 있는 넓은 암반이다. 미루어 짐작컨데, 매월당 김시습과 여덟 선비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비분한 나머지 관직을 버리고 청석골에 은거하여 바둑으로 소일하며 지낸 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주차장과 매월폭포로 가는 중간에는 최근에 신축한 아담한 별장이 하나 생겼는데, 그 별장 이름이
[별빛산장]이다. 아마도 이름처럼 한밤중에 이 산장에서 하늘의 별빛을 보면 이 산장의 이름이
그냥 지어진 것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을 것 같다.




매월폭포 아래에서 매월당 김시습에 대한 저 마다의 생각들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담소하다가 원골쪽에 있는
임꺽정 촬영세트장이 남아 있는 곳으로 갔다. 벽초 홍명희(?~1562)의 대하소설 [임꺽정/林巪正]을 1996년
SBS가 드라마로 제작한 곳이다. 그리고 실제로 임꺽정의 본거지가 바로 청석골 이곳이라 한다.
 
임꺽정은 조선 중기의 의적(義賊)으로 16세기 중반 몰락농민과 백정·천인들을 규합하여 지배층의 수탈정치에
저항, 정국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홍길동(洪吉童)·장길산(張吉山)과 함께 조선의 3대 도적으로 일컬어진다.

경기도 양주에서 백정 신분으로 태어나 황해도에서 생활했다. 뜻을 같이하는 비슷한 처지의 농민 수십 명과
그 가족으로 집단을 이루어 황해도의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도적활동을 시작했다. 날쌔고 용맹스러우며 지혜
로웠던 그는 1559년경 황해도·경기도·평안도까지 활동영역을 넓혀 이 지역의 관청이나 양반·토호의 집을 습격,
이들이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인 재물을 빼앗았다.

또한 서울·평양 간 도로와 그밖의 주요교통로를 장악하여 정부가 농민들로부터 거두어들인 토지세·공물·
진상물 등을 탈취했다. 이와 함께 관군의 방비와 토벌의 허점을 교묘히 찌르며 세를 확장하면서, 빼앗은
재물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어 의적으로서의 성가를 높이고 이들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다.




위기감을 느낀 정부 지배층이 여러 차례 관군을 동원하여 진압하려 했으나, 이를 번번이 물리치고 1559년에는
개성부 포도관 이억근(李億根)마저 잡아죽였다. 1560년 가을에는 봉산·개성을 거점으로 서울까지

진출했으나, 같은 해 11월 참모인 서림(徐林)이 체포되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정부는 서림에게서 활동의 계획과 비밀을 알아내고 선전관 정수익(鄭受益)과 봉산·평산의 관군으로 하여금
토벌하도록 했으나 뛰어난 전투력과 농민·이서(吏胥)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 세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당시 이서와 농민의 도움은 임꺽정의 부대가 모이면 도적이 되고 흩어지면 백성이 되어 출몰을 예측할 수 없어
잡을 수가 없다고 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1561년에 들어 황해도, 경기도 북부, 평안도, 강원도 지역에 출몰하
여 활동했으나 관군의 대대적인 토벌이 이어져 형인 가도치(加都致)가 체포되는 등 세력이 점차 위축되었다.

토포사 남치근(南致勤)이 이끄는 관군의 끈질긴 추격으로부터 도망하던 중 마침내
1562년 1월 서흥에서 부상을 입고 체포당해, 15일 만에 죽음을 당했다.




임꺽정의 의적활동은 연산군 이후 명종대에 이르기까지 조선 전체에서 일어났던 농민봉기의 일환이며
그 집약점이었다. 이 시기 농민의 저항은, 당시의 사관이 [도적이 되는 것은 도적질하기 좋아서가 아니라
배고픔과 추위가 절박해서 부득이 그렇게 된 것이다. 백성을 도적으로 만드는 자가 누구인가]라고 기록한
바와 같이 사회경제적 모순이 격화됨에 따라서 지배층에 저항하여 전국 각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임꺽정 집단의 치열하고 오랜 활동은 정부·지배층에게는 불안과 공포의 위기의식을
심어주었으며 피지배층 일반에게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도 상반되어 지배층은
그를 흉악무도한 도적이라고 했고 민중들은 의적으로 영웅시했다. 그뒤 그에 관한 많은 설화가 민간에
유포되었고, 그의 행적이 소설과 드라마로 그려진 것이다.




매월당 김시습님도 만나보고.. 의적 임꺽정님도 만나 보았으니 이제 우리들만의 피서지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이곳 청석골에서 약 20여분 하오현고개 방향으로 가면 복주산 원골이 있는데, 그곳은 일반인들과
전문 산꾼들에게조차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숨은 계곡으로 갔다.




계곡은 지난 밤에 내린 비로 상당히 불어 있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흙탕물이 아니고 맑은 청정수였다.
아마도 이 계곡은 대체로 암반으로 형성되어 있고 뿌리 깊은 천연림이 그대로 있어서인가 보다.




계곡물은 주로 급경사지대로 흐르며 때로는 작은 폭포를 형성하기도 하면서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해발 800m가 넘는 북사면 지대라 수온은 평균 10도 아래이므로 손과 발을 물에
1~2분 담그면 시리고 아려서 더 이상 담그고 있을 수 없을 정도였다.




햇빛은 나지 않는 날이였지만, 간간히 오락가락하며 뿌리는 가랑비 때문에 휴대용 간이 천막을 설치하였다.




산 높고 골 깊은 계곡이라, 아직은 아무도 찾는이 없는 곳이 남한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그리고 모두 늙은 사내들만이라서 홀라당 벗고 물속에서 오래버티기를 하였다. 당연히 지는 넘은 서울에
돌아가서 마감주를 사기로 했다. 총 4명이였는데 한 명은 약 1분만에 KO되고, 또 한 명도 약 2분만에
용수철처럼 팅겨져 나왔고, 나머지 두명은 약 3분만에 승패가 결정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런데..
웃기는 것은 승자의 거시기가 말씀이 아니였다..^(^ 오그라들고 찌그러 질대로 찌그러진..^(^ 
더 이상 필설로는 말하기가 힘들다. 걍~ 상상만으로 연결하시라요.. ^(^ 캬캬~




그 외에도 몇가지 계곡 물놀이로 천상의 피서를 즐기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화천군 사창리 화음동에
있는 [곡운구곡]를 들렸다. 말나리가 한가로이 피어 있는 곡운구곡도(谷雲九曲圖)의 제 4곡에 해당하는
[백운담]은 불어 난 강물로 평소의 아름다움이 묻혀 버렸다. 물론 다른 8계의 담(潭)들도 모두 불어 난
강물에 묻혀버려서 백운담에서만 몇 장 찍사를 해보았다.




곡운구곡도(谷雲九曲圖)는 지금의 강원도 화천 용담리 일대에서 30년 가까이 은둔 생활을 한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1635~1705) 선생이 빼어난 경치에 이름을 붙인 뒤 당대의 화가
조세걸(曺世杰)에게 그리게한 작품으로 이 작품은 조선시대의 실경산수화 (실제 경치와
유일하게 일치하는 작품으로) 이므로  문화적 가치가 매우 큰 것이다.




한국의 자연경관 문화에는 3경(景), 8景(詠), 9景(曲), 10景(詠), 12景(詠)이 있는데 8경은 약 98처, 9곡은
6처가 파악되고 있다. 9곡은 강원도 화천의 곡운구곡(谷雲九曲), 강원도 삼척의 무릉구곡(武陵九曲),
충청도 괴산의 화양구곡(華陽九曲), 선유구곡(仙遊九曲), 고산구곡(孤山九曲), 황해도 해주의
고산구곡(高山九曲)등 6개처가 밝혀지고 있다.




아쉬운 것은 불어 난 물에 묻혀버린 풍광들이다. 사실 이렇게 묻혀버린 풍경들이 아니라면 곡운구곡의 9계를
모조리 찍사하여 옛 곡운구곡도와 비교하여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오늘은 4곡인 백운담만 찍었다.
하긴 물이 적었다면 지금 이곳에는 넘처나는 피서객들로 초만원 상태였으리라~! 한 여름철이 지나고
가을이 올때쯤이면 강물도 적당히 흐를때쯤 이쪽방면으로 산행을 할때 곡운구곡의 9계를 실사로
찍사하여 옛 그림과 비교하여 다시 영상작업을 꼭 해봐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였다.




白 雲 潭(제 4곡)

四曲川觀椅翠巖 奔衆 沫無時歇
近近人松影落 雲氣尋常漲一潭(從子 昌協)

사곡이라 시냇물 푸른 바위 기대보니,
가까운 솔그림자 물속에서 어른댄다.
날뛰며 뿜는 물 그칠줄을 모르니,
기세 좋은 못 위엔 안개 가득 끼었네.




臥 龍 潭(제 6곡)

六曲幽居枕綠灣 潛龍不管風雲事
深潭千尺暎松關 長臥波心自在閑(子 昌直)

육곡이라 그윽한 곳 푸른물을 벼개삼고,
천길 물 송림사이 은은하게 비친다.
시끄러운 세상일 숨은 용은 모르니,
물 속에 들어누어 한가히 사누나.



明 月 溪(제 7곡)

七曲平潭連淺灘 山空夜靜無人度
淸漣漣向月中看 唯有長松倒影寒(從子 昌業)

칠곡이라 넓은 못은 얕은 여울 연했으니,
저 맑은 물결은 달밤에 더욱 좋다.
산은 비고 밤은 깊어 거너는 이 없으니,
큰 소나무 외로이 찬 그림자 던진다.




疊 石 台(제 9곡)

九曲層巖更 然 飛湍暮與松風急
台成重壁暎淸川 滿洞天(外孫 洪有人)
 
구곡이라 층층바위 또다시 우뚝한데,
첩첩히 쌓인 벽은 맑은 물에 비치네.
노을 속에 저 물결 송풍과 견주우니,
시끄러운 그 소리 골짜기에 가득하다.
(후예 金彰顯역)



 


반 백년의 내 인생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친 매월당 김시습에 대하여.. 그리고 생을 살면서 늘 흠모했던
임꺽정의 발자취를 조금은 더듬어 볼 수 있었고..실경산수화의 의미를 눈 뜨게 해준 곡운(谷雲) 김수증과
조세걸(曺世杰)까지 두루 섭렵할 수 있어서 행복했던 하루였다. 물론 산 높고 골 깊은 계곡에서의
우리들만의.. 우리들식(?)의.. 천상피서도 더 없이 좋았고 기억속에 영혼히 각인 되었다. 큼큼~
 
 
 
2010/08/10 - 휘뚜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