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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산행기

옆지기와 함께 다녀온 인왕산 바위들에 얽힌 전설들..(2018/02/04)

by 휘뚜루50 2019. 6. 22.

 

▒ 옆지기와 함께 다녀온 인왕산 바위들에 얽힌 전설들..

      - 2018/02/04 -

 

일년에 수십번 운동삼아 다녀오는 인왕산을 모처럼 옆지기와 함께 다녀 오다. 그리고보니 인왕산은 나와 깊은 인연으로 맺어

진듯하다. 내 유년시절과 청소년 시절까지 산 아래 문화촌에 살았던 관계로 시간만 나면 수시로 들락거렸던 인왕산이 였는데..

1968년 1, 21사태(일명 김신조 무장공지 사건)로 입산이 통제되고 1993년 문민정부에 다시 개방되고 나서도 나는 오래동안

인왕산을 찾지 않았다.

 

 

그리고 하세월이 흘러 잡다한 일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몇년전부터 다시 인왕산을 찾게 되었다. 주로 옆지기의 운동을 위한

워킹산행으로 찾지만 나에게는 유년시절과 청소년 시절의 아련한 추억들이 묻어 있는 인왕산이라 각별한 느낌이 있다.

 

 

오늘은 지난날의 내 기억들을 더듬어서 인왕산에 얽혀있는 전설과 바위들에 대하여 알아 보겠다.

 

                                                                                       ↑ 인왕산 정상의 봉우리를 예전에는 낙월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 인왕산 치마바위의 전설 "신첩이 여기 있사옵니다"


서울의 서쪽에 해당하는 종로구 옥인동, 누상동, 사직동, 무악동, 홍제동, 부암동에 걸쳐 있는 인왕산(338m)은 조선 개국 초기에 '서산이'라 지칭하다가 세종 때부터 인왕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본래 인왕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의 이름인데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이름을 개칭하였다 한다. 인왕산하면 호랑이이야기를 뺄 수 없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 년 전, 인왕산은 호랑이의 횡행으로 난동이 끊이지 않았다. 경복궁 내정이나 창덕궁 후원에까지 내려와 소란을 피우고 고양 등지의 민가에까지 침입하여 그 피해인원이 수백 명에 달하자 조정에서 군대를 출동시켜 호랑이잡이에

나설 정도였다. 그래서 지금도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없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호랑이가 활기를 치고 다녔던 곳이라 산의 형세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좌청롱 우백호를 이루는 보기 드문 명당으로 청와대의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고 있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청와대를 비호한다는 이유로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지난 1993년부터

출입이 허가되어 아침·저녁으로 생수통을 들고 약수터를 찾는 사람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산 속으로 들어가면 기묘한 바위들을 만날 수 있는데 그 중 인왕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펼쳐진 '치마바위'가 눈에 띈다.

구불구불 주름잡힌 치마를 연상케 하는 이 바위에는 중종 때의 폐비 신씨와 관련한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 이후의 일이다. 반정을 일으킨 공신들은 신씨왕비를 몰아내고 인왕산계곡으로 내쫓았다. 폐비의

친정아버지인 신수근이 정적이라는 이유로 그 딸 역시 국모로 모실 수 없다는 뜻에서다. 당시 신씨의 나이는 겨우 스무살

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열세살 어린 나이에 진성대군의 아내가 되어 7년 만에 폐비가 되었으니 그 여린 마음에 상처가

얼마나 깊었겠는가.


왕비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갑작스런 폐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망막하기만 하였다.

상궁 곁에서 치마 자락 이끌며 곱게 자라고 보니 반항도 받아들임도 벅차기만 하였다.
신씨는 먹을 것, 잠자는 것을 잊은 채로 멍하게 궁을 내려다보며 중종에 대한 그리움을 키워갔다.


한편 경회루에서는 중종도 신씨와 똑같은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다.

중종은 인왕산을 바라보며 아침을 맞고 인왕산을 바라보며 잠이 들었다. 하루 종일 신씨에 대한 연정의 끈을 놓지 않았다.


사무친 그리움 속에 신씨는 나날이 야위어갔다. 안간힘을 다해 중종의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공허한 메아리뿐,

저 아래 경회루는 한없이 고요하였다. 신씨는 마지막으로 입고 있던 치마를 벗어 바위에 걸쳐놓는 것으로

“신첩이 여기 있사옵니다. 아직 전하를 잊지 못하옵니다.”라는 뜻을 전하였다.


그러나 신씨의 사무친 마음은 끝내 경회루에 닿지 않았고 수백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인왕산을 찾는 이들에게 새롭게 읽혀

지고 있다. 인왕산 정상에 서면 경복궁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와 고층건물 하나 없던 그 시절에는 신씨가 전한 사랑의

신호가 전해졌을 것도 같은데, 당시 중종의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하지만 중종은 첫사랑 신씨가 폐위된

뒤 두 명의 왕비를 맞고서도 첫 부인에 대한 연정을 잊지 못했다 하니 신씨의 간절한 마음만은 전해졌던 것 같다. 큼큼~

 

                                                                                                        ↑ 붙임바위는 기차바위(벽련봉) 정상 부근에 있다.

▒ 소원을 들어 주는 인왕산의 "붙임바위"


인왕산엔 유독 바위가 많아. 산 전체가 온통 바위로 덮여 있는 산이다.
그래서인가..? 인왕산에는 기묘하게 생긴 바위도 많고, 그 바위마다 하나씩 사연도 지니고 있다.


인왕산에 ‘붙임바위’라고 하는 바위가 있다. 정상(낙월봉) 조금 아래 일명 기차바위(벽련봉)에 나무숲에 가려져 있는 2m 정도

의 공기돌 같은 붙임바위가 있다. 겸재 정선의 그림에도 나온다. 붙임바위를 한자어로‘부암(付岩)’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부암동

(付岩洞)이라는 동네 이름이 이 붙임바위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이 붙임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깃들어 있디.
고려 때의 일이다. 당시 고려는 늘 몽골의 쿠빌라이 칸이 세운 원나라의 침입을 받아왔다. 원나라 군사가 쳐들어오면 이 땅의

젊은이들은 모두 군대에 가야만 했다. 물론 직업 군인들도 있었지만, 그 수가 모자라다 보니 평소에는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던 젊은 남자들도 전쟁이 나면 모두 창칼을 들고 전쟁터로 나가야만 했다.


한 농촌에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젊은 부부가 있었어. 결혼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신혼부부였다. 이들은 아침이면 함께

들에 나가서 농사일을 했고, 해가 질 무렵이면 집으로 돌아와 오순도순 사랑을 나누던, 매우 금실이 좋은 부부였다.


그러나 신혼부부라고 해서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어느 날, 창을 든 포졸 몇 명이 이들 부부를 찾아왔다.


“내일 아침까지 전쟁터로 나갈 준비를 하시오~!”


젊은 부부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였다. 이 땅의 젊은이라면 바람 앞의 등불 처지가 된 나라를 구하러 나가는 것이 마땅한 일이

었지만, 결혼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집을 떠나 전쟁터로 간다는 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었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우선 나라가 있어야만 부부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으니까.


“여보, 섭섭하지만 참고 기다리시오. 원나라 놈들을 물리치는 대로 곧 돌아오리다.”


남편이 이렇게 위로했지만, 아내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내 역시 담담하게 말했다.


“부디 몸조심하세요. 집안일은 걱정 마시고요.”


이튿날 아침, 남편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떼어 전쟁터로 향했다. 아내 또한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지만, 웃는 얼굴로 남편을 배웅했다. 남편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아내에게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고 손짓을 했다.

 


그러나 아내는 눈물을 흘리면서 동구 밖 느티나무 아래에서 오래오래 남편이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남편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더니 아내의 눈에서 사라지고 말았어. 아내는 집으로 돌아와서는 하얀 소복으로
단정하게 갈아입고 마을 뒷산에 있는 바위로 올라갔다.


“신령님, 부디 제 남편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아내는 바위를 작은 돌로 문지르면서 오랫동안 기도를 했다. 이 기도는 몇 달에 걸쳐 계속되었다. 작은 돌로 문지른
곳에 커다란 구멍이 생길 정도로 빌고 또 빌었다. ‘지성이면 감천’, 즉 마음을 다하면 하늘도 감동한다고 했던가?
아내의 기도에 하늘이 감동한 듯 드디어 전쟁은 끝이 났고, 남편은 다친 곳 하나 없이 무사하게 돌아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아내가 바위에 문지르던 돌이 남편이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리기가 무섭게 그만 바위에
떡 붙어 버렸다. 사람들은 이 소문을 듣고 이 바위에 신통력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 집안에
환자가 있는 사람 등 크고 작은 소원을 빌려는 사람들이 어느새 이 바위에 돌을 문지르면서 기도하는 일이 잦아졌디.


동시에 붙임바위는 그들이 돌로 문지른 까닭에 여기저기 움푹움푹 패여 마치 벌집 모양처럼 되어 버렸다고 한다.
서울 한복판에 작지만 우람한 모습으로 서 있는 인왕산. 치마바위, 붙임바위 외에도 선바위, 삿갓바위, 병풍바위 등
기기묘묘하게 생긴 바위들이 참 많다. 그리고 이들 바위들은 모두 전설이나 역사적 사실을 하나씩은 간직하고 있다.

 

                                                                                                                                   ↑ 선바위는 국사당 뒤에 있다.

▒ 인왕산(仁王山) 선바위(禪巖:석불각)의 전설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산 3번지 4호 인왕산 서남쪽에 있으며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4호로 지정된 입석 바위로
커다란 바위의 군데군데가 묘한 모습으로 파여져있다.


선바위는 부인들이 이 선바위에서 아이 갖기를 기원하는 일이 많아 "기자암(祈子岩)" 이라고도 한다. 선바위의
모습이 마치 스님이 장삼(長衫)을 입고 서 있는 것처럼 보여 참선한다는 "선(禪)" 자를 따서 선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선바위는 조선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상(像)이라는 전설도 있고 이성계 부부의 상이라는 전설도 있다.


일제가 남산에 자신들의 신사를 세우면서 남산에 있던 국사당(國師堂)을 이곳 선바위 곁으로 옮기게 한 뒤로
선바위에 대한 신앙은 무속신앙과 더욱 밀접하게 되었습니다. 국사당은 무신(巫神)을 모시는 제당으로 굿을
행하는 곳이어서 국사당 뒤에 있는 선바위와 연계된 무속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옛 문헌에는 조선 태조 때 한양 천도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한양 도성을 쌓을 때 선바위를 무학대사는 도성 안에 포함하자고 하고, 정도전은 성 밖에 두자고
하였다, 이때 정도전이 말하기를 "선바위를 도성 안에 들이면 불교가 성하고 밖에 두면 유교가 흥할 것이라 하니
태조가 정도전의 의견을 따르도록 하였다, 이에 무학이 탄식하며 "이제부터 승도들은 선비들의 책 보따리나 지고
따라다닐 것이다." 라고 하였다는데, 이런 것으로 보아 조선초기부터 이 선바위가 인왕산의 특징적인 암벽으로
시선을 끌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얼굴바위는 인왕산 곡성 끝자락에 있다.

                                                                                                                    ↑ 얼굴바위는 인왕산 곡성 끝자락에 있다.

▒ 인왕산(仁王山) 얼굴바위(여인바위)


얼굴바위를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서 각양각색으로 보이는 인왕산의 기암. 얼굴바위 바로 아래쪽에서 (장군바위 앞에서 혹은

장군바위 위에서) 바라보면 그 생김새가 마치 무명옷을 입은 여인이 앉아서 일하다가 인기척에 고개를 옆으로 돌린 얼굴처럼

보이는 바위. 독립문 공원 방향에서 보면 곧 굴러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바위다. 인왕산 한양성곽 곡성 밖에

위치하고 있다.

 

                                                                                              ↑ 모자바위는 인왕산 한양 곡성 밖 달팽이바위 옆에 있다.

▒ 인왕산(仁王山) 모자바위.


모자바위라는 이름은 붙었는데 모자처럼 보이기보다는 흑백의 기이한 사람 얼굴 형상으로 보인다.
인왕산 여인바위와 모자바위는 나란히 있다. 여인바위 위에는 서울성곽의 곡장이라고 하는 넓은 장소가 있는데,
현재는 군부대가 상주하고 있어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 해골바위는 국사당 선바위 뒤에 있다.

▒ 인왕산(仁王山) 해골바위(장군바위)


거대한 바윗덩이여서 장군바위라고 부르지만, 측면에서 보면 두개골에 구멍이 뚫린 모습이어서 일명 누워있는
해골 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장군바위에 올라가서 여인바위를 바라보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한다.

 

                                                           ↑ 매바위는 인왕산 정상에서 곰바위 방향으로 내려오는 급경사 아래쪽 왼편에 있다.

▒ 인왕산(仁王山) 매바위


인왕산 정상에서 범바위로 내려가다 보면 왼편 시내 방향으로 보이는 매의 부리를 닮았다고 "매바위"로 불리는 인왕산의

명물바위 중 하나이다. 매바위 정상에 있는 저 명품 소나무는 50년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자란 것 같지 않다. 예전에

가묻이 심할 때는 산 아래 인왕천 약수터에서 물을 길러다 뿌려주곤 하였었지..^^

 

                                                                                                    ↑ 달팽이바위는 인왕산 곰바위 아래쪽 오른편에 있다.

▒ 인왕산(仁王山) 달팽이바위

 

인왕산 범바위를 지나 오른편으로 바라보면(얼굴바위가 있는 곡성) 달팽이처럼 생긴 유독 검은 바위가 달팽이 바위이다.

그러니가 국성 아래 국사당 위쪽으로 선바위, 해골바위, 억굴바위, 달팽이바위가 집단으로 모여 있다.

 

↑ 인왕산 곡성 밖에 있는 얼굴바위와 모자바위와 달팽이바위  

 

↑ 인왕산에서 바라본 북한산과 북악산(백악산) 전경

 

↑ 인왕산(338m) 정상

 

↑ 인왕산 정상에서 사직공원 방향의 하산길에 바라본 인왕산 곡성과 곰바위 전경

 

↑ 곰바위에서 바라본 인왕산 정상

 

↑  곡성 주변에 있는 바위들..

 

큼큼~ 이상으로 인왕산에 얽혀 있는 전설과 바위들에 대하여 대충 알아 보았다.

미처 살펴보지 못한 바위와 전설들은 확인 되는 대로 보충하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성산대교에서 바라본 결빙된 한강의 모습이다.

날씨가 좀 풀려야 나홀로 먼산산행을 다녀올 수 있는데..^^

 

2018/02/06 - 휘뚜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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