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금선사(金仙寺)의 목정굴(木精窟) 설화(說話)와 비봉 남능선 릿지산행
-2018/02/15 -
구정(舊正) 전날이라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먼산산행은 여러모로 불편하기에 서울 시내에 있는 비봉을 가볍게 다녀 올 요령으로
집에서 아침밥을 든든히 먹고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비봉 들머리인 '이북 5도청'으로 갔다. 사실 북한산 비봉라인을 산행하며
문수사와 승가사 절집은 많은 등산객들이 들려다 가는 사찰이지만..의외로 금선사는 알지도 못하지만 들리지도 않는 편이다.
구기동 이북5도청에서 비봉으로 가는 비봉탐방센터 입구..
금선사(金仙寺)로 가기전에 먼저 만나게 되는 목정굴(木精窟) 입석을 지나면..
금선사(金仙寺) 무무문(無無門)을 지나게 되고..무무문(無無門)은 대도무문(大道無門)에서 가져온 이름이라 하는데, 시공 불교
사전에는 "부처의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정해진 형식이 없어서 언제, 어떤 곳에서든, 어떤 방법으로든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
는 뜻으로 정의하였다.
이조시대 순조 탄생비화가 얽혀있는 목정굴(木精窟)이다. 목정굴(木精窟)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인지 실화인지 전해오는 야그가 있다. 조선시대 정조 때의 일이다.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하여 불교에 대한 폐해가 극심하던중 대구 팔공산의 파계사에 주석하시
던 용파(龍波)스님은 정조를 알현하고 불교에 대한 극심한 폐단이 있음을 아뢰니, 정조는 이의 시정을 약속하면서 왕실의 대를
이을 왕자를 잉태하기 위한 기도를 부탁하였다.
정조는 슬하에 세자가 없어 고심하던 중이었다. 마침내 그에게 세자탄강(世子誕降)을 위한 기도를 명하게 되었다. 용파스님은
이를 수락하고 금선사에서 정진하시던 농산스님께 전후 사정을 말씀드렸고, 두분 스님은 수락산 내원암과 삼각산 금선사에서
각자 기도에 들어가셨다. 농산스님은 바로 이곳 목정굴에서 300일간 관음기도를 올린 것이다.
기도가 익어갈 무렵 용파스님이 선정에 들어 살펴보니 왕자의 몸을 받아 태어날만한이가 농산스님 밖에 없는지라 농산스님께
왕자로 환생할 것을 아뢰니, 농산스님께서 이를 수락하시고 수빈 박씨의 꿈에 현몽하시어 환생의 뜻을 밝히시고는 기도를
마치고 상서로운 징후를 보이며 열반에 들었다. 이때 왕실에 발신을 알 수 없는 봉서 하나가 올라 왔는데 " 경술(庚戌)
6월 18일 세자탄강(世子誕降)" 이라 적고 있었다.
과연 순조는 바로 이 날 태어났다. 이 날 서북쪽으로부터 맑고 붉은 서기가 왕실에 닿아 산실을 휘감고 있었다. 사람을 놓아
그 진원을 추적하게 하니 그곳은 다름 아닌 바로 이곳 목정굴이었다. 굴 안에는 좌탈(坐脫)한 채로 앉아 있는 농산스님의
탈살신(脫穀身) 뿐이었으나 서기는 여전히 그의 정수리로부터 산실(産室)로 흘러 들고 있었다.
농산스님의 입적과 순조로의 환생을 목도한 정조는 내수사(內需司)에 명(命)하여 목정굴 위에 절을 크게 중창하게 하였으니
곧 금선사이다. 수락산 내원암의 사적에 두분 스님 사이에 오고 간 서신이 남아있어 이 이야기를 전한다. 지금도 금선사에는
순조의 탄신제(誕辰祭)를 모시고 있다.
▒ 다음은 금선사와 용파스님과 농산스님에 대한 설화이다.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正祖)왕 때다.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가 민정을 살피기 위해 경향 각지를 유랑하다가
사불산(四佛山) 대승사(大乘寺)를 들렀는데 젊은 스님들이 전각 위에 걸터앉아 재미나게 장기를 두고있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장 받아라.” 한 스님이 소리쳤다. 옆에 있던 스님이 “장은 무슨 장을 받으라는 게요..?”
“스님, 상(象)장입니다.” 다시 옆에 있던 스님이 말(馬)로 상을 치면서 차(車)의 길을 트면서 큰 소리로 “멍군을 받으시오”
라고 소리를 질렀다.
암행길에 오른 박문수는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스님들이 절에서 염불이나 참선같은 수행을 해야지 이 무슨 신선
놀음인가. 또 깨침을 얻은 스님들이라면 세간에 나가 널리 부처님 가르침을 펼쳐야지 절에 틀어박혀 장기놀이를 하다니….”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한 박문수는 한양으로 돌아와 이 사실을 임금에게 고했다. “전국을 돌아보니 중들이 사찰에서 장기나
두고 무위도식(無爲徒食)하고 장기나 두고 있으니 무엇인가 일을 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가뜩이나 불교를 배척해 왔던 조정은 전국의 사찰에 명하여 스님들이 닥종이로 한지를 만들어 진상하도록 했다. 닥종이가 없는
금강산과 같은 산승들에게는 석청에 잣을 넣어 만든 ‘잣박산’을 진상하도록 명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지방 토호세력들도
스님들에게 족보를 만들 종이를 바치라느니 잔치음식을 만들어 오라느니 하면서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니 진정으로
수행하려 하는 스님들도 정진을 할 수 없게 되고 급기야는 절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러한 세태를 보고 파계사에서 수행하고 있던 용파스님은 크게 걱정하며 시정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관청에 가서
호소를 해 보기도 하고, 상소문을 써서 올려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거 도저히 안되겠구나. 다른 방도를 써야겠다.”
용파스님은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 이 일을 해결해야겠다고 작심하고 남해 거제도로 들어가 100일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스님은 아예 들어갈 때 배 삯만 가져가고 나올 때는 물 위로 걸어 나올 각오로 기도에 들어갔다. 식량도 딱 100일치만 가지고
섬으로 들어갔다. “내 이곳에서 신통력을 얻기까지 한발짝도 물러나지 않으리라.” 그러나 정진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식량도 다 떨어졌고, 며칠동안 굶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꿈속에 노인이 나타나 호통을 쳤다.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무슨 수행을 그리도 열심히 하시는가. 이제 식량이 없으니 큰일이구만. 며칠 뒤에 내가
식량을 해결해 줄 터이니 우선 저 아래에 있는 돌꽃(石花)으로 끼니를 연명하시오.”
꿈에서 깬 용파스님은 노인 말대로 바닷가로 내려가 보니 석화가 있었다. 3일을 이것으로 연명하니 무서운 태풍이 몰아치더니
육지에서 배가 한척이 밀려왔다. 그 안에는 쌀 두가마니와 소금 한 말이 들어있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로구나. 분명 이것은
부처님이 보내신 게 틀림없을 것이야.” 마음을 다잡은 용파스님은 무섭게 수행에 몰두해 신통력을 얻어 바다위를 걸어서 육지로 나왔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용이 파도를 타고 오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용파(龍波)스님이라고 불렀다.
육지로 나온 스님은 축지법을 써서 한달음으로 한양에 당도했다. 스님이었지만 산발 한 상태로 임금을 만날 날을 기다리며
물지게를 지고 물을 팔았다. 그러나 임금을 만나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저히 안되겠다. 신통력을 써야겠다.”
스님은 한강물을 청룡과 황룡이 엉키어 올라가는 서기방광(瑞氣放光)의 신비한 모습을 만들었다. 때마침 대궐을 거닐던 정조
임금이 광경을 보고 그 연원을 알아보게 했다. 신하들은 급히 상서로운 기운이 나오는 집을 추적해 보니 다 늙은 노인이 누더기
한 장을 덥고 드러 누워 있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인데 여기에 있는 거요..?”
“시골에서 온 중입니다." 용파스님은 자신이 이곳에 온 사연과 임금을 만나서 하려는 말에 대해 소상하게 설명했다.
“참으로 기한 인연이오. 나는 임금님을 모시는 별감이오. 내 마침 전하의 명을 받들기 위해 이곳에 왔으니 어서
가서 전하를 뵈알하시지요.”
궁궐로 들어간 스님은 임금에게 눈물로 호소를 했다. “사람들 가운데는 게으른 사람도 있고 부지런한 사람도 있는데,
어찌 전하께서는 일부 스님들의 게으른 모습만 보시고 전체인양 처분을 내리시니 조선 팔도의 수행자들이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이 처분을 거두어 주소서.” 정조임금은 보통 스님이 아님을 단박에 알고 조건을 걸었다.
“좋소. 그렇다면 그대도 나의 부탁을 들어주시오. 아직 후사가 없어 걱정이니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오.”
용파스님은 정조임금의 청을 받아들이고 잠시 천안통을 열어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인물을 물색했다. “예, 전하.
그렇게 해 올리겠습니다. 다만 소승이 만나 함께 기도해야 할 스님이 있으니 그렇게 하도록 윤허해 주십시오.”
정조임금의 허락을 받은 용파스님은 금선사(金仙寺)로 발길을 그곳에서 주석하고 있던 농산(聾山)스님을 만났다.
“제가 조선에서 스님들에게 박해를 가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 임금과 약조를 했는데, 소승이 임금의 후사를 이어
주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선정에 들어 살펴보니 이 일을 해 주실 분이 농산스님 밖에 없어 보여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소승은 아직 이 생에 할 일이 많아 지체해야 되겠기에….”
이렇게 해서 용파스님은 수락산 내원암에서, 농산스님은 금선사 목정굴에서 300일 관음기도에 들어갔다. 기도가 회향되어 갈
무렵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는 태몽을 꾸었다. “소승은 농산이라는 사람인데 삼각산 금선사에서 관음정진 중입니다.
용파스님의 청으로 이제 제가 수빈마마의 몸 속에 들어가 이 나라 대를 이을 것이니 그리 알 주십시오.”
다음날 왕실에는 발신을 알 수 없는 봉서(封書) 하나가 올라 왔는데 “경술(庚戌) 6월 18일 세자탄강(世子誕降)”이라 적고 있었다. 수빈 박씨는 급히 금선사에 사람을 보내 자초지정을 알아보니 목정굴에서 정진하던 농산스님이 앉은 채로 열반에 들었고,
굴 안에는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했다고 전해왔다.
과연 경술년 6월 18일이 되니 서북쪽으로부터 맑고 붉은 서기가 왕실에 닿아 산실을 휘감고 있었다. 사람을 놓아 그 진원을
추적하게 하니 그곳은 다름 아닌 바로이곳 목정굴이었다. 그 상서로운 기운은 왕실로 이어져 수빈 박씨의 산실(産室)과 연결
되어 있었다. 농산스님 입적과 순조로의 환생을 목도한 정조는 조선에서 스님을 피팍하던 폐습을 없애고 내수사(內需司)에
명(命)하여 목정굴 위에 절을 크게 중창하게 하였으니 곧 금선사이다.
또 다른 이야기에는 농산스님이 금강산 만회암에서 평생 천수주력으로 도력을 얻었으며 전라남도 완도에 있는 고금도
에서 석화를 양식으로 1000일 기도를 한 뒤 도를 통했다고 적고 있다. 현재 금선사는 일제시대의 강점으로 폐사되었
으나 광복 후에는 도공스님이 중건을 했고, 현 주지 법안스님이 1996년 3월에 복원해 수월관음보살을 봉안하고 전통
사찰로 등록했다. 금선사는 요즘도 음력 6월18일에는 순조의 탄신제(誕辰祭)를 올리고 있다. -끝-
목정굴(木精窟) 비밀의 문을 통과하여 금선사(金仙寺)로 들어갔다. 북한산 금선사(金仙寺)는 고려말 조선초의 고승 무학 자초
(無學 自超 1327-1405) 대사께서 도읍을 정하고자 삼각산을 살피던 중, 지금의 금선사터에 삼각산의 정기가 서려있고
부처님이 상주하시며 중생들을 제도하는 듯에서 절을 지으니 바로 금선(金仙: 부처님)사였다.
창건 이래로 수행자와 기도 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찰이었으나, 일제의 압정기에 관리소홀로인하여 퇴락하게 되었다.
서기 1949년(불기2493년) 이를 안타깝게 여긴 도공(道空)스님께서 중건 하시고, 지금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현 주지
법안(法眼)스님이 목정굴을 복원 (1996년 3월)하여 수월관음보살을 봉안하였고 전통사찰로 등록하였으며 미타전법당과
추모시설인 연화당, 삼성각, 적묵당을 중수하였다.
무학대사에 의해 창건된 금선사는 목정굴이라는 천연의 기도처가 있으니, 창건이래 많은 수행자와 기도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사세를 일신하여 세간에 기도명찰로 알려져 있다. 부처님께서 상주하시는 기도처인 이곳에서 수행하시던 농산(聾山)
스님이 조선의 순조대왕으로 환생하신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등 기도처로써 여러 영험담이 전해지는 기도도량으로도 유명하다.
금선사 신중탱화(서울시 유형문화재 161호)는 광서 13년인 1887년에 제작된 것으로 인법당에 모셔져던 것이다. 비교적 화기
(畵記)의 내용이 선명하게 남아있어, 북한산 지역의 불화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생각된다. 화기에 신중탱이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초 부터인데, 금선사에 봉안된 신중탱화에서도 ‘신중탱’의 명칭이 표현되어 있다. 금선사 신중탱화의
전체적인 색조는 붉은 계통이고, 도상은 단순하다. 현재는 표구된 상태로 보관해오고 있다.
금선사 북카페인 웅향각에서 바라본 인왕산과 안산 전경..금선사에서 유일하게 전망이 열리는 곳이다.
금선사를 유유자적 한바귀 돌고 포금정사터 삼거리로 가는 길에서 오른편 능선으로 붙으면 바로 비봉남능선 길이다.
비봉남능선길은 초반부터 끝까지 전망이 시원하게 열리는 특급 조망 릿지길이다. 건너편에 보이는 봉우리는 족두리봉이다.
내 어렸을적 문화촌에 살적에는 '독바위'라고만 불렀다.
향로봉 전경..기억을 더듬어 보니 이 봉우리는 향림담 후봉이라고 한 것 같다. 언제 누가 향로봉으로 바꿔서 불렀는지 모르겠다.
족두리봉과 향로봉 전경..가운대 능선은 탕춘대능선이다. 탕춘대성의 탕춘대(蕩春臺)는 "봄을 호탕하게 즐긴다"는 뜻으로 연산군 시절 세검정 옆 고지대에 세운 잔치용 전각이었다. 탕춘대성의 본이름은 서성(西城)인데 탕춘대와 가까운 곳에 있다 보니 탕춘
대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성을 알기 위해서는 숙종의 서울 방어 계획부터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숙종은 송시열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의견 차이로 37년간이나 북한산성 축성(築城:성 쌓는 일)을 갑론을박 하고도 결론이 없자 스스로 결론을
내린다. 그 결론의 변(辯)이 얼마나 멋진지 북한지를 읽으면서 나는 기분이 상쾌하였다.
“마치 사람 얼굴이 다르듯 만약 모든 의견이 같아지기를 기다린 연후 일을 한다면 일 될 날이 없다.(如人面之不同 若必待諸議俱
同 然後作事則事無可成之日)” 이래서 37년을 논의하고 불과 9개월 만에 북한산성을 쌓았다(1711년). 그런 후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해 만일의 사태에는 서울도성 대부분의 백성을 이곳으로 옮겨 항전의 자세로 돌입한다는 계획이었다.
임진란, 병자호란 때 임금은 모두 도성을 버리고 몽진(蒙塵: 피난길)에 올랐다. 그렇게 해서 쌓은 성(城)이 조지서 동구
(造紙署洞口: 조지서는 지금의 세검정 초등학교 앞인데, 그 동네 입구라는 뜻)를 막은 탕춘대성이었다. 탕춘대성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구기터널 위도 지나고, 암문도 만나고, 상명대학교 담을 좌측으로 끼면서 내려가면 탕춘대성의 정문 홍지문
(弘智門)과 오간수문(午間水門)이다. 그러니까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이중 산성인 것이다.
초반부터 조금 까칠한 1봉으로 올라가는 릿지길..올라가기 싫은 님들은 우회하는 길이 있다.
까칠한 릿지코스를 올라서면 힘든만큼 시원한 조망을 보여주고 있다.
구기동 일부와 홍제동 방면이 조망되고..
은평구 백련산과 응암동방면이 조망되고 있다. 탕춘대능선 뒤의 장사바위는 지금 장군봉으로 바꿔서 부르고 있다.
파노라마로 담아본 전경..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 것 같은 바위.. 반세기가 흘러갔는데도 밑으로 굴러 떨어지지 않고 옛모습 그대로 버티고 있다.
힘겹게 릿지를 하여 올라온 릿지길..
옆에 있는 이 릿지길은 조금 쉬운 코스이다.
1봉 사면길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산들..1
1봉 사면길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산들..2
지나온 금선사 계곡길..
건너편의 쪽두리봉을 줌으로 당겨 보았다.
족두리봉에서 비봉까지 전경을 파노라마로 담아 보았다.
1봉 왼편 사면에 있는 점박이 바위..저 바위에서 초보 바위 산꾼들이 오버행 연습을 하는 곳이다.
1봉 사면에서 바라본 관봉, 비봉, 2봉 전경..
2봉을 줌으로 당겨보니 개구리바위 뒷모습이 보이고 있다.
1봉 정상.. 가운데 홈통으로 릿지를 하여 올라갈 수 있는데, 마지막 오버행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왼편으로 돌아가면 쉽다.
1봉 왼편으로 돌아가는 사면길..수십미터 절벽길이라 조심해서 지나가야 한다.
1봉 최고의 테라스 전망대..힘든 릿지길을 보상해 주는..그리고 세상에 모든 근심과 걱정을 한방에 보상해 주는 테라스이다.
1봉 테라스에서 바라본 족두리봉 방향의 전경..
1봉 정상에 숨겨져 있는 거북이 형상바위..셍각하고 바라보는 자에게만 보이는 거북바위이다.
1봉 정상에 있는 공기돌바위..원래는 5개였는데 2개는 누구인가 훔처 갔는가 보다..^^
1봉에서 내려다 본 금선사 전경..
1봉에 있는 또 다른 테라스 전망대..이곳에서는 보현봉 방향이 조망되고 있다.
비봉라인과 보현봉이 정면으로 보이고 있다.
보현봉 사자능선의 쌍사자바위와 형제봉이 살짝 보이고 있다.
칠성봉과 보현봉을 중심으로 담아 보았다.
보현봉과 쌍사자봉을 줌으로 담아 보았다.
1봉에서 2봉으로 가는 능선길에 있는 명품송 한 그루..
잠시 여유로운 능선 안부길을 걷고..
다시 까칠한 사면 릿지를 돌아 올라가면..
비봉남능선에 있는 또 하나의 명물바위인 개구리바위를 만나게 된다. 어느 누구는 물고기바위라고 하기도 한다.
역광이 아니라면 조금 아래쪽에서 찍사를 하면 영락없는 개구리상인데..지금은 물고기와 개구리 중간 형상이다.
개구리바위에서 바라본 족두리바위 전경..
2봉 정상으로 바로 올라가는 약간 오버행 릿지코스..사진 가운데 흰 링표시를 잡고 올라갈 수 있는 숨어 있는 인공홀드이다.
릿지 초보자는 상당히 난해한 코스이므로 안내자 없이 도전하지 말기 바란다.
조금 먼거리에서 바라본 개구리바위 전경..
2봉 정상으로 우회하여 가는 또 다른 릿지길 위에 있는 비박지..이 릿지길은 하강할 때 조심해야 한다.
자신이 없는 사람은 다시 빽하여 아래쪽으로 완전 우회를 하여 가면 된다.
사면길에서 바라본 문수봉과 보현봉 전경..
사면 릿지길에서 바라본 명품송 한 그루..
2봉 정상에서 북면으로 내려오는 로보트바위 하강코스..로보트바위 형상은 3봉에서 바라보면 로보트로 보인다.
로보트바위는 2개의 홈통을 이용하여 어느 쪽으로든 내려오고 올라 갈 수 있다.
2봉 로보트바위 후면에 있는 또 다른 비박지..주로 여름철에 이용하면 시원한 곳이다.
2봉을 지나 3봉으로가며 잠시 족두리봉과 향로봉을 조망하다.
이번에는 향로봉과 관봉을 조망하다.
그리고 비봉을 조망하다. 앞쪽에는 3봉 직전에 있는 코끼리바위이다.
코끼리바위를 줌으로 당겨 보았다. 이 코끼리바위 역시 관심을 가지고 바라봐야 보이는 바위이다.
3봉에 있는 죠스바위..또는 명태대가리바위이다.
죠스바위와 로보트바위 전경..
저 로보트바위는 언제쯤이면 벌떡 일어나 걸어갈 수 있을까..^^아마도 3차대전이 일어나면 제일 앞장서서 전쟁터로 나가겠지..^^
3봉 정상에서 바라본 비봉 전경..
3봉 정상 주변에 있는 명품송 한 그루..
3봉 정상에 있는 오리나무가 작년의 열매를 아직 가득 매달고 있다. 예전에 북한산 수목으로 저 오리나무를 정했는데..요즘은..?
비봉남능선의 명물인 잉어바위 전경..
잉어바위 전망대에서 뒤돌아본 지나온 3, 2, 1봉 전경..
이것도 통천문이라고 하는지..
사모바위에서 쌍사자바위까지 전경.. 예전 문화촌에 살 때 사모바위를 우리들은 '엄지바위'라고만 불렀다.
고도를 조금 더 높이고 가까이서 바라본 잉어바위 머리와 족두리봉 전경..
잉어바위를 가장 지근거리에서 담아본 전경..
비봉능선과 의상능선이 겹처 보이는 전경..
그때 우리들은 이 봉우리들을 뭉뚱거려서 '삼각산'이라 불었지..
파노라마로 담아본 '삼각산' 전경..
릿지길에 있는 명품송 한 그루..
비봉 정상으로 바로 올라가는 홈통릿지길..겨울철에는 안전장비없이 맨손 릿지로 이 길은 위험하므로 우회하였다.
이곳에서 정규 등산로쪽으로 안전하게 진행하였다.
비봉으로 올라가는 이곳이 남능선과 합치는 곳이다.
코뿔소바위 전경..
비봉 주변에 있는 명품송 한 그루-1
비봉 주변에 있는 명품송 한 그루-2
비봉 주변에 있는 명품송 한 그루-3
비봉 주변에 있는 비밀굴속에 나의 소망을 담은 작은 돌탑..
비봉 정상의 진흥왕 순수비각이다.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놓았고 이것은 복사본이다.
지나온 비봉남능선의 봉우리들..
족두리봉과 향로봉, 관봉 방향..
고령산과 챌봉 전경..
비봉 암봉 정상에 있는 삼각점..이곳이 실질적인 정상이다.
비봉 정상에서 바라본 남쪽 방향..
비봉 정상에서 바라본 서쪽 방향..
비봉 정상에서 바라본 북쪽 방향..멀리 북한산 총사령부가 조망되고 있다.
비봉 정상에서 바라본 동쪽 방향..
북한산을 파노라마로..
북한산 총사령부를 줌으로 당겨 보았다.
비봉에서 내려와 관봉방향으로 가기전 바라본 관봉과 향로봉 전경..
줌으로 당겨보니 향로봉에 여러사람들이 있다.
사거리 안부..나는 이곳에서 왼편 포금정사터 방향으로 하산을 했다.
포금정사터길에 있는 비봉의 또 하나의 명물바위인 '애기곰바위'..?
아니면 '물개바위'..? 그리고 보니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서 '애기곰'도 되고 '물개바위'도 되는 것 같다.
포금정사터 삼거리 이정목..
포금정사지터이다. 포금정사는 1968년 1,21사태 때 무장공비에게 밥을 먹였대서 패사된 포금정사이다. 이 절을 혹자는
향림사가 있던 자리라 지목한다. 포금정사의 전신이 향림사라고 덧붙이지만 이를 입증할 흔적과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포금정사터는 몇년전까지 많은 산악회의 시산제 장소로 활용되던 곳이였는데..요즘도 그러한지 모르겠다.
포금정사터에서 금선사로 내려가는 중간에 있는 금선사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조망터에서 바라본 금선사가 계곡 소나무 숲속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전망대에 변함없이 굳굳하게 자라고 있는 명품송 한 그루..
대략 50년전 문화촌에 살 때 산친구들과 제집 안방 드나들듯 다녔던 북한산 비봉능선..그 중에서도 비봉 남능선은 릿지훈련
코스로 많이 활용하였던 곳이였다. 그 후로 비봉남능선은 한번도 다녀가지 않아서 전 코스가 낮설기만 하였다. 하지만 낮설은
코스를 기억을 더듬으며 올라보니 그 때 함께 릿지를 했던 친구들의 이름이 아련하게 가물거린다.
문득 길재(吉再)의 회고시가(懷古詩歌)가 스처지나간다.
"오백 년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큼큼~
2018/02/17 - 휘뚜루 -
Girl From Key Biscayne
Diego Mod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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