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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 대하여

죽음에 대한 소고(小考)

by 휘뚜루50 2022. 8. 7.

▒ 죽음에 대한 소고(小考)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생각 차체를 애써 외면
한다. 먹고살기 바빠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만큼 여유가 없기도 하거니와 작심을 하고 생각
해 봐야 남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할 만한 결론을 내리기도 어렵다. 

누군가 죽으면 ‘명복을 빈다’, ‘삼가 조의를 표한다’와 같은 애도의 뜻을 표할 뿐 더 이상 죽음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죽음은 이야기할 만한 유쾌한 주제도, 편한 대화의 소재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후 세계가 존재하는가..?’ ‘인간
에게 영혼은 있는가..?’ ‘천당’ ‘지옥’ 같은 말을 화두로 던지면 분위기 썰렁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죽음’, ‘사후 세계’, ‘영혼’, ‘천당과 지옥’을 말하려면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s)적인 얘기
를 꺼내야 하는데 형이상학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더 어렵다. 또 ‘죽음’의 좋고 나쁨을, ‘자살’ 
행위의 옳고 그름을 논하자면 ‘윤리’, ‘도덕’을 말해야 하는데 평생 철학을 연구한 학자가 아니고
서야 어느 누가 죽음에 대해서 쉽게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어찌하여 죽음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고 치자. 행여 남의 말 잘 들어 주는 관대한 
친구가 있다면 ‘너 요즘 힘들구나’라고 말하며 동정이나 위로의 말을 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런 말을 하는 친구의 진심은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 들을 만큼 들었으니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하자’라는 뜻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 눈치 없이 ‘죽음’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간다면 아마 다음 모임에 초대받기는 어려울것이다. 그나마 알고 지내던 친구들도 
하나둘씩 멀어질 것이다.

 

▶ 죽음에 관한 말들..

우리는 살면서 죽음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하지 않지만, 일상생활에서 죽음을 빗댄 말은 많이 
한다. 예를 들면, ‘일하기 싫어 죽겠다’ ‘꼴 보기 싫어 죽겠다’ ‘얘가 말을 안 들어 죽겠다’라는
말은 수시로 한다. ‘강한 부정’이나 ‘심한 반대’를 표현하면서 ‘죽겠다’라는 말을 쓴다. 

얼마나 싫으면 ‘죽겠다’라는 말을 할까. 말하는 이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좋아서 죽겠다’라는 말도 있다. 좋은데 왜 굳이 죽겠다는 것인지 의아하지만, 이 역시 기쁨 
또는 좋아함의 정도가 얼마나 큰 지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식의 표현에서 ‘죽겠다’는 ‘죽음’ 즉 생명 활동의 중단을 의미한다기보다는 부정 또는 
긍정의 상태를 강력하게 표현하기 위함이다. 죽음을 빗댄 표현을 조금 더 살펴보자.

​“인생에서 절대 피할 수 없는 두 가지는 세금과 죽음이다.” 이 말은 마크 트웨인이 했다고 하여 
널리 알려졌다. 이 말의 본뜻은 살아있는 한 ‘세금을 안 내고는 살 수 없다’라는 의미다. 죽음과 
세금은 연관 관계가 약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필연성을 끌어들여 납세의 의무를 강조
한 말이다. 그럼에도 고액의 탈세를 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니 ‘돈이 죽음에 앞선다’라고 할 만하다.

또 이런 말도 있다. “사는 게 죽느니만 못하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말로 처한 상황이 감당하기 힘들고 어려울 때 쓰는 말이다. 그렇다면 말을 뒤집어서 “죽는 게 
사느니만 못하다”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을까? 

죽는 게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사는 게 낫다는 말이 가능한가? 자살하려고 하는데 계속 실패
하는 경우가 그런 사례일 것이다. 블랙 코미디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지만 현실에서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시도해 볼 만한 일은 아니다.

해내기 어려운 일이나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고자 할 때 또는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강한 의지로 도전할 때 하는 말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말을 쓴다. 정작 이런 말을 
하면서 덤벼들지만 결과는 처참하게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운이 좋으면 기절하는 정도로 
끝난다. 남들이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말이라고 해서 맹신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태어나는 것은 순서가 있지만 죽을 때는 순서가 없다”라는 말도 있다. 이 말은 죽음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이란 언제 닥칠지 모른다는 의미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평소에 
건강하던 사람도 갑자기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빗대어 쓰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말을 들으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기도 있지만 ‘일반화의 오류’인 경우가 많다. 즉 전체
가 아닌 일부의 특수한 사례를 가지고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되는 오류다. 보통 신체 건강하고 
젊은 사람의 죽음은 전체 중 아주 일부의 사건이지만 이런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되면 기억에 
오래 남고 강한 인상을 남긴다. 통상 비슷한 연령이 아니면 나이가 많은 사람 또는 병약한 
사람이 먼저 죽을 확률이 높다.

​겁 없이 무모하게 대들거나 위험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경솔한 행동을 할 때 “죽고 싶어 
환장했냐..?”라는 말을 한다. 이는 상대방의 무모함이나 경솔함을 나무랄 때 쓰이는 말이다. 
가끔 ‘죽고 싶어 환장한 사람’의 행동이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벼랑 끝 전술’이 통할 때가 
있다. 그러나 진짜 벼랑에서 떨어지면 이거야말로 ‘환장할 노릇’이다.

 

▶ 죽음에 대한 철학자의 생각

죽음은 ‘공포’, ‘고통’이라는 단어를 떠오르게 한다. 죽음을 두려움 없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죽음은 두려워할 것도 나쁘다고 할 것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인 사람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urus)와 로마 시대
의 철학자 루크레티우스(Lucretius)다. 에피쿠로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가장 끔찍한 불행인 죽음은 사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한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다. 하지만 죽음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이미 사라
지고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있든 이미 죽었든 간에 죽음은 우리와 무관하다. 살아있을 때는 
죽음이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내가 살아있는 동안 죽음은 없고, 내가 죽으면 내가 사라지기 때문에 죽음을 나쁘다고 
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맞는 말 같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말장난 같다. 재치 있는 말인 것 같지
만 그렇다고 해서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주장의 검증하려면 결국 ‘존재란 무엇인가?’ 
‘영혼은 있는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것이 더 어렵다.

에피쿠로스의 추종자로 알려져 있는 로마 시대의 철학자 루크레티우스(Lucretius)는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에 영겁의 세월이 있었다는 사실에 우울해하는 사람은 없다. 때문에 죽은 이후에 
무한한 비존재의 상태가 이어진다고 해서 우울해하는 것은 모순이다’라고 주장했다. 

죽음으로 인해 살면서 누릴 수 있는 좋은 것을 ‘상실’하거나 ‘박탈’되는 것은 맞지만 ‘비존재 
상태라고 해서 나쁠 것이 없다’라는 입장이다. 루크레티우스의 주장도 결국 ‘존재’, ‘비존재’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죽음을 무작정 두려워할 만 한 일은 아니다. 두 철학자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죽음을 대한 두려운 생각이 누그러져서 위안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역설적인 
말 몇 마디로 인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들도 죽었다.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지만, 죽음을 앞두고 그들이 주장한 대로 ‘두려워하거나 
나쁠 것이 없다’라고 생각하며 죽음을 받아들였을까? 나는 그것이 ‘궁금해 죽겠다’.

지금까지 죽음에 대한 잡스러운 생각을 글로 적어봤는데 역시나 죽음은 어려운 주제고, 
유쾌하지도 않다. 그럼 언제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까? 죽음이 임박할 
때쯤 고민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미리 죽음에 대해 고민한들 죽음이 멀어지는 것도 
아니며, 죽음에 대한 진실이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다.

2022년 8월 7일 - 휘뚜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