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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산행기

희미한 기억속의 발길따라 걸어본 인왕산(仁王山:340m) 산행

by 휘뚜루50 2020. 3. 8.

▒ 희미한 기억속의 발길따라 걸어본 인왕산(仁王山:340m) 산행

       - 2020/03/03 화요일 -


인왕산(仁王山)을 풍수지리설로 풀어보면 한양의 도읍을 정할 때 정도전의 뜻대로 주산을 북악산으로 하지 않고 무학대사가

말한 인왕산(仁王山)으로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이따금 하게 된다. 인왕산 서편에 궁궐이 들어섰다면 '어진 임금'

이라는 인왕산의 이름처럼 조선도 개국 초기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기보다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시작하지 않았을까..?

경복궁 왼쪽에 자리한 인왕산은 예로부터 황제가 태어날 명당이 있다는 말들이 심심찮게 돌았다. 도성의 풍경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풍경, 한양을 대표할 풍경은 모두 이곳 인왕산 주변을 맴돌고 있다. 특히 필운대(弼雲臺), 청풍계(淸風溪), 반송지

(盤松池), 세검정(洗劍亭)은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의 '국도팔영(國都八詠)'에 꼽혀 한양 명승지의 절반을 인왕산

자락이 차지했다. 하지만 지금은 인왕산 주위로 아파트가 병풍처럼 들어서 땅의 기운을 가로막고 있는 듯하다.

인왕산은 340m(국토 지리원 기준)의 낮은 산이지만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서울의 진산(鎭山 : 삼각산, 북악산) 중의

하나로 우(右) 백호에 해당하는 산이다. 경치가 빼어나 이 산을 배경으로 그린 진경산수화중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가 유명하다.(경복궁 리룸미술관 보관, 국보제216호)

인왕산 산행 들머리를 나의 집에서 교통이 편리한 사직단(社稷壇 : 구 사직공원)으로 하였다.

조선 후기의 화가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의 (社稷壇圖)를 기초로 2025년까지 복원 공사중이다. 1395년 조선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한 뒤 가장 먼저 조성하게 한 것이 종묘와 사직단이였다. 종묘는 조상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왕실의 사당으로 왕이 조상께 제사를 지냄으로서 효를 실천하는 장소였다. 사직은 토지의 신 '사(社)와 곡식의

신 '직(稷)'을 가리키는 말로 왕이 직접 유고의 예에 따라 제사를 지내던 백성을 위한 행사였다.

현재 사직단(구 사직공원)은 대대적이 공사중이라 사방이 꽉막혀있고 옛 사직공원 위쪽에 있는 단군성전(檀君聖殿)만이

개방되어 있었다. 단군성전(檀君聖殿)은 단군을 모시는 민족종교인 대종교가 아니다.

단군성전(檀君聖殿)은 대종교 단군성전이아니라 대한민국최초의 공공건물(서울시 소유)로 세워진 단군성전이며, 봉안된

단군영정은 정부표준단군영정(문공부심의번호 77-27)임을 알려드리며 용도는 종교를 초월한 국민교육과 국가홍보에

사용 되고 있다고 한다.

사직단을 통과하여 황학정(黃鶴亭)으로 갔다.

황학정(黃鶴亭)은 경희궁 옆에 있는 활을 쏘는 궁터인데 고종황제가 노란색 곤룡포를 입고 활를 쏘는 모습이 노란 학이

춤을 추는 듯 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22년 일제가 경성중학교를 짓기 위해 경희궁을 헐 때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등과정은 조선시대 무사들의 궁술 연습장으로 유명한 사정(射亭)이다. 사정이란 활터에 세운 정자를 말하는데, 등과정은
서울 서쪽 지역에 있는 다섯군데 이름난 사정 가운데 하나였다. 갑오개혁이래 궁술(弓術)이 폐지되면서 헐렸다.

황학정(黃鶴亭)에서 바라본 풍경..

인왕산 숲길을 알리는 안내 돌비석..

황학정(黃鶴亭)을 지나 인왕산로 길을 따라가면 인왕산 황금호랑이상이 있다. 이름하여 인왕산 호랑이이다.

인왕산로를 따라 가다가 수년전에 개방된 인왕산 약수터로 향하였다.

약수터로 가는 새로 설치한 테크계단길..

예전 청화대를 지킨다는 명목하에 설치한 경비초소 건물..이름하여 수호신 쉼터라고 한다.

팔각형태의 이 건물은 수호신 쉼터로써 군 장병들이 경계근무 및 훈련으로 인한 피로를 풀기 위한 휴식 장소로 활용되

었던 곳이다. 이곳은 구릉지에 위치하여 서울 야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경관이 뛰어난 곳이기도 하다. 하여 서울시는

상부만 철거하고 남은 수로신 쉼터의 흔적을 보존하여 옛 기억을 되살릴수 있게 하였다.

수로신 쉼터와 암벽등반 훈련장 바로 옆에 있는 수영장이다.

계곡을 활용한 수영장 터이다. 이곳은 수호신 쉼터에서 장병들이 휴식과 훈련을 위해 계곡을 막아 조성된 수영장으로

규모는 가로 7m, 세로 2,5m로 가장 깊은 곳은 2,7m이다.

백호 암벽등반 훈련장이다.

이곳은 과거 인왕산 경비를 담당했던 백호부대 장병의 암뱍 훈련을 위해 있던 백호 암뱍 등반장이며

높이는 약 39m(건물 10층 높이)이다.

제1경비단은 청와대, 인왕산, 북악산(백악산)을 경비하는 부대의 늑성상 병력은 신장 178cm 이상, 시력 1,5 이상, 격투기
유단자, 청와대에서 요구하는 신원조회 통과자로 차출해 왔으나 현재는 병력부족의 이유로 그 기준은 사라졌다고 한다.

암뱍등반 위쪽에서 내려다 본 초소막사와 수영장 전경..

남산 방향..

최근에 설치한 이정목..

인왕천 약수터 전경..

인왕산 약수터 암각(巖刻)글씨..누구인가 왕자 글씨를 대충 바로 잡아 놓았다. 旺(성할왕)이 아닌 王(임금왕)으로..

인왕천 약수물은 석간수라 이렇게 탱크를 설치하여 받도록 설치하였다.

인왕천 약수터 석벽에 자라고 있는 명품송 한 그루..

인왕천 약수터 부근에 고목이 된 늙은 오리나무에 누구인가 돌맹이를 가득 채워 넣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꽃인줄 모르는 오리나무수꽃이다. 자세히보면 위쪽에는 약간 붉은색의 작은 암꽃이 피어 있다.

또 누구인가는 그랬다. 오리나무수꽃은 신라의 선화공주 금귀고리라고..^^ 이른 봄철에 가장 먼저 피는 나무꽃이다.

힘들게 살아가고있는 명품송 한 그루..

인왕산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속인들의 굿당으로 사용했던 토굴 중의 한 곳..

무속인들이 만들어 놓은 암각화(巖刻畵)..

무속인들이 만들어 놓은 암각화..

좁은 석벽길.

어느 무속인이 만들어 놓은 황금 미륵불상..

황금 미륵불상 옆에 있는 토굴..제법 큰 이 자연동굴 역시 어느 무당이 굿당터로 사용했던 곳이다. (한국산서회 자료에

따르면 이곳이 금강굴이라고 추정하고 있었다.) 그리고보니 예전에 이곳이 금강암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석굴암 앞에 있는 닭바위로 가는 길..

닭바위 전망대 전경.. 이곳에서는 닭바위로 보이지 않고..

칠성암터(할매신당)에서 바라보면 닭이 알을 품고있는 바위로 보인다.

닭바위 전망대는 예전에 청와대 주변을 살피는 경비초소였다.

닭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남산과 범바위 방향..

닭바위 전망대에서 줌으로 당겨본 범바위 전경..

닭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인왕산 정상과 치마바위 전경..

이곳에서 바라보면 치마바위 전경이 가장 치마바위같이 보이는 곳이다.

인왕산 치마바위는 정상 바로 밑 동면에 매우 넓게 펼쳐진 바위로서 여인의 주름치마를 펼쳐 널어 놓은 듯한 바위

사면이다. 중종과 폐비 단경왕후 신씨의 애틋한 전설이 있는 바위이기도 하다. 구불구불 주름잡힌 치마를 연상케

하는 치마바위는 병풍바위라고도 부른다. 치마바위 전설 보러가기.. http://blog.daum.net/wkdaudgh50/12

치마바위에는 암벽 각서(刻書)의 흔적이 보인다. 예전에는 단순히 일본놈들의 글씨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최근에

인터넷을 통하여 알아 보았더니 서울 지역 근대문화유적을 조사, 연구하는 이순우씨가 최근 저 흔적에 대해 소상히

밝힌 글이 있었다.

치마바위를 자세히 보면 각서(刻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암벽 각서(刻書)의 글씨는 모두 한자(漢字)로 쓰여 있는데..

우선 한글로 대체해 보았다. 원래는 모두 한자(漢字)로 되어 있는 암벽각서(刻書) 사진 오른쪽 열부터는 다음과 같다.

제 1열; 東亞靑年團結
제 2열; 皇紀二千五百九十九年 九月十六日
제 3열; 朝鮮總督 南次郞

다시 제 3열과 약간 사이를 띄어 그 왼쪽에, 대회 개최 사실과 기념하는 사유를‘ 한 열에 28글자씩, 네 줄로’새겨 놓았었다.

치마바위 암벽각서를 구체적으로 보러 가기..

☞ 인왕산 치마바위와 東亞靑年團結 http://blog.daum.net/robustus/16887664

지금은 각서(刻書)의 글씨를 얼마전에 모두 지워서 흉터만 남아 있다.

예전에 사용했던 경비초소에서 사용했던 자동감시 카메라.. 뒤로 백악산, 또는 북악산이 조망되고 있다.

자동 감시 카메라 아래에는 멍멍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산과 멀리 좌청룡격인 낙산이 조망되고 있다.

줌으로 당겨본 푸른 기와집 부근..지금은 문통님이 국가와 민족과 서민들을 위하여 불출주야 노력하시고 있다.

줌으로 당겨본 남산과 개나리 동산인 응봉산 전경..

닭바위 주변에 있는 석굴암 전경..종로구청에서 시민들의 휴식처로 만들어 준 사각정자가 석굴암 창고로 사용중이다.

석굴암 전경..예전에는 옥등굴이라는 기록있다.

석굴암 출입구..석굴암은 거대한 두개의 바위로 되어 있는 석굴로 그 바위 아랫틈으로 두개의 문이 나있는 암자이다.

한자로 적힌 석굴암이라는 이름을 보고 새삼 뜻을 풀어보니 '바위굴 암자'라는 의미이다. 고유명사 보다는 일반명사

처럼 흔하게 쓰이는 이름이다. 석굴암이라는 이름의 암자는 경주 토함산은 물론, 양주 오봉산(북한산), 서울 도봉산,

제주 한라산에도 있다.

석굴암 내부의 전경..

 

 

이번에는 석굴암 산신각으로 가 보았다,

산신각은 지난 2018년 10월 4일 산신각에 켜놓은 촛불 화재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천향암으로 가다 뒤돌아 본 석굴암 전경..뒤로 치마바위가 보인다.

천향암으로 가는 길..

천향암으로 가는 벼랑길에는 명품송들이 줄비하였다.

천향암은 자연동굴이다. 세모로 난 입구 곳곳에 천향암(天香庵)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

천향암 내부 전경.. 예전에 어느 서촌 토박이 어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기억해보면 일제를 피해 명성황후가

몸을 숨긴 곳이 석굴암 근처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곳이 라고 하였다. 그러나 구전일뿐 기록은 없다.

천향암(天香庵)에서 바라본 서울 중심부와 남산 전경..

석굴암 건너편에 있는 미륵존불로 가 보았다.

바위에 암각화(巖刻畵) 되어 있는 미륵존불 전경..내 생각에는 이곳 미륵존불에서 단경왕후가 자기 속옷인 치마를

바위에 걸었다는 곳이 이 부근 어디쯤일 것 같았다. 경복궁 궁궐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이 여기임으로..

미륵존불 옆에 새겨져 있는 또 다른 암각화(巖刻畵)..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의 암각화(巖刻畵) 같다.

 

 

미륵존불에서 바로 위에 있는 옛 칠성암터와 할매무당터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하여 우회하여 가면 조금은

까탈스러운 릿지코스를 통과해야 한다. 다행히 안전을 위하여 누구인가 밧줄을 설치해 두어서 쉽게 올라갔다.

이 암벽 릿지길은 치마바위 암장 훈련장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암벽 릿지길 위에서 바라본 백악산 방향..

옛 칠성암터이자 할매신당.. (참고: 한국산서회의 자료에 따르면 이곳이 칠성신을 모신 칠성암터라고 한다.)

지금도 누구인가 할매신당을 비밀리에 운영하고 있는 곳인듯..

삼각형 토굴속에는 할매신당이 곱게 단장을 하고 있다. 화려한 조화와 각종 술과 과일과 과자같은 물건들이 함께 있다.

할매신당에서 바라본 남산의 전경..

할매신당에서 바라본 백악산과 경복궁 방향.. 닭바위가 알을 품은 닭의 모습으로 보인다.

닭바위를 줌으로 당겨 보았다. 할매신당에서 닭바위를 바라봐야 알을 품는 닭바위처럼 보인다.

산 아래 수성동 방향..

경복궁과 남산 방향..

할매신당 직벽 위의 암봉을 줌으로 당겨 본 풍경..

다시 백악산 전경..

다시 서울 시내 전경..

할매신당 위에 있는 암장 훈련장 전경..

암장 훈련장에서 올려다 본 전경..일본놈들이 바위에 새긴 글씨들이 지금은 마모한 흔적이 두렸하게 보인다.

암장터에 있는 명품송 한 그루..

최근에도 암장훈련을 하고 있나 보다.

전체적인 암장훈련장 모습..

주름치마바위쪽 암장코스 전경..

치마바위에 있는 명품송 두 그루..

치마바위에 있는 명품송 한 그루..

치마바위 암장터에서 내려와 건너편 조망처에서 바라본 전경..

사진 중앙의 밧줄코스가 올라가고 내려오는 코스이다.

석굴암 위쪽 암봉에 있는 명품송 한 그루..

석굴암 위쪽 암봉에서 바라본 주름치마바위 전경..

아래쪽 전경..

남산 방향..

북악산과 말바위, 그리고 낙산 방향..

줌으로 당겨본 백악산 전경..

다시 푸른 기와집 부근..

석굴암 위의 암봉에 있는 명품송 한 그루..이곳은 여름철에 바람과 그늘이 있어 쉬어가기 좋은 일급 테라스들이다.

조망처 뒤에 있는 제법 커다란 자연동굴 굿당터..필경 예전에 이름을 들었을텐데..영 굿당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최근 한국산서회 자료에 의하면 이곳이 바로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 스스로 조성했다는 개인 암자인 복세암(福世菴)

터라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조의 복세암은 산정(山頂) 부근의 암자였다고 하니 이곳 이외의 다른

비정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굿당터 정면 전경.. 지금 정면에 설치한 사각돌은 1968년 김신조 사건 이후에 군인들이 초소로 사용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들이다. 예전에는 자연석으로 조금은 조잡하게 만들어 어느 굿당으로 활용되었던 곳으로 기억하고 있다.

굿당터 내부 전경.. 내부는 두 개의 방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십여명이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운 공간이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굿당터를 지나 인왕산 주 등산로에 합류하여 정상으로 가다보면 책바위가 있다.

책바위를 지나 정상으로 가는 길목에서 뒤돌아 바라본 전경..북한산 의상능선의 봉우리들이 조망되는 곳이다.

아직도 매달려 있는 묵은 팥배나무 열매들..

기차바위 뒤로 보현봉과 형제봉. 그리고 백악산이 조망되고 있다.

백악산과 좌청룡인 낙산 전경..낙산 자락에 있는 삼선동의 옛 벗들은 지금 어느 하늘아래에 살고 있는지..?

어쩐일인지 오늘은 인왕산 산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외국인들 뿐이다.

예전에 없던 인왕산 정상 표시목..

인왕산 정상(340m)이다. 원래 인왕산 정상의 이름은 어느 시대에는 낙월봉이라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인왕상 정상을

어느 지도에는 338,2m라고 하는데..국립지립원 표준지형도에는 340m로 표시하고 있기에 나도 340m로 표시한다.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북한산 비봉능선 전경..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북한산 형제봉 능선 전경..

인왕산 정상 부근에 있는 명품송 한 그루..

인왕산 하산길에 바라본 범바위와 곡성부근의 전경..

남산과 범바위와 곡성 전경..

하산길에 있는 명품송 한 그루-1

하산길에 있는 명품송 한 그루-2

하산길에 있는 명품송 한 그루-3

 

하산길에 있는 명품송 한 그루-4

명품송 사이로 바라본 안산 전경..

한양도성 성곽과 범바위와 곡성과 안산 전경..

하산길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는 독특한 자태의 바위(매바위..? 코끼리바위..?)에 기이한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매바위 또는 코끼리바위에서 바라본 남산과 범바위와 곡성 전경..

사실 인왕산에는 수많은 명품바위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바위의 명칭을 표시해 준 지도나 기록은 없다.

매바위 또는 코끼리바위에서 바라본 범바위와 곡성 전경..

그러므로 저마다 사람들이 생각나는 대로 명명하여 명품바위 하나에 평균적으로 두서너개의 이름들을 가지고 있다.

매바위 또는 코끼리바위로 가는 길목 부근에 있는 명품송 한 그루..

이 바위만 하더라도 매바위, 코끼리바위, 촞대바위 등등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같은 바위지만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또 바라보는자의 느낌에 따라 달리 보이니 그렇게 불러지는 것인가 보다

매바위 또는 코끼리바위 또는 촛대바위 부근에 있는 명품송 한 그루..

하여 나는 약 50전부터 알고 있었던 이름은 매바위였으므로 그냥 매바위로만 기억하련다. 

그리고 언제인가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의 해설서를 읽으며 보니

이 바위를 매바위라고 하였다.

범바위로 가며 뒤돌아 본 인왕산 전경..

인왕산과 백악산 전경..

범바위 아래에 있는 범의 굴로 갈려다 다음에 들려 보기로 하였다.

저 바위가 호랑이처럼 생겨서 범바위라고 하는게 아니고 저 바위 오른쪽 아래 자연토굴이 있는데 그곳에서 옛날에

호랑이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하여 범바위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어디를 봐도

범처럼 생기지 않았다고 불평들하고 있다.

범바위에서 바라본 안산 방향..

범바위에서 줌으로 당겨본 안산 전경..

범바위에서 바라본 백련산 방향..

범바위에서 뒤돌아 바라본 인왕산 전경..

범바위에서 바라본 백악산과 낙산 전경..

범바위에서 바라본 곡성..지금은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어 곡성은 출입금지구역이다.

범바위에서 바라본 곡성 전경..

범바위에서 바라본 한양도성 전경..이 도성길은 정동과 남대문을 거처 남산으로 연결되어야 하는데..

사직에서부터 남대문까지는 도시화되면서 성곽도 없고 길도 없다.

달팽이바위와 모자바위..그리고 얼굴바위 전경..

딜팽이바위와 모자바위..

달팽이바위에서 바라본 범바위와 인왕산 전경..

달팽이바위에서 바라본 도성성곽 전경..

인왕산(仁王山) 곡성 끝에 있는 얼굴바위(또는 여인바위)라고도 한다.

달팽이바위에서 내려다 본 해골바위 전경..

얼굴바위 아래 약수터..요즘도 비밀리에 많은 무속인들에게 장소를 제공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달팽이바위에서 바라본 범바위와 인왕산, 그리고 백악산 전경..

도성성곽과 서울시내 전경..

요즘도 달팽이바위 아래는 무속인들의 굿당터인듯..

달팽이바위 측면에 기생하고 있는 작은 명품송 한 그루..

바위에 조그마한 틈도 없는데 작은 소나무 한 그루가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두고두고 관찰해 볼 일이다..^^

달팽이바위 아래 석벽에 있는 명품송 한 그루..

얼굴바위를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서 각양각색으로 보이는 인왕산의 기암. 얼굴바위 바로 아래쪽에서 (장군바위

앞에서 혹은 장군바위 위에서) 바라보면 그 생김새가 마치 무명옷을 입은 여인이 앉아서 일하다가 인기척에

고개를 옆으로 돌린 얼굴처럼 보이는 바위. 독립문 공원 방향에서 보면 곧 굴러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바위다. 인왕산 한양성곽 곡성 밖에 위치하고 있다.

인왕산(仁王山) 장군바위는 거대한 바윗덩이여서 장군바위라고 부르지만, 측면에서 보면 두개골에 구멍이 뚫린

모습이어서 일명 누워있는 해골 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장군바위에 올라가서 여인바위를 바라보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한다.

장군바위의 뒷 모습..

장군바위 조금 아래쪽에 있는 해골바위..

약수터와 무당굿당터가 있는 곳..

선바위로 가는 길에 있는 명품송 한 그루..

명품송이 있는 곳에서 바라본 선바위 전경..

건너편 서대문 향무소 전경..

▒ 인왕산(仁王山) 선바위(禪巖:석불각)의 전설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산 3번지 4호 인왕산 서남쪽에 있으며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4호로 지정된 입석 바위로
커다란 바위의 군데군데가 묘한 모습으로 파여져있다.

선바위는 부인들이 이 선바위에서 아이 갖기를 기원하는 일이 많아 "기자암(祈子岩)" 이라고도 한다. 선바위의 모습이

마치 스님이 장삼(長衫)을 입고 서 있는 것처럼 보여 참선한다는 "선(禪)" 자를 따서 선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선바위는 조선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상(像)이라는 전설도 있고 이성계 부부의 상이라는 전설도 있다.

일제가 남산에 자신들의 신사를 세우면서 남산에 있던 국사당(國師堂)을 이곳 선바위 곁으로 옮기게 한 뒤로
선바위에 대한 신앙은 무속신앙과 더욱 밀접하게 되었습니다. 국사당은 무신(巫神)을 모시는 제당으로 굿을
행하는 곳이어서 국사당 뒤에 있는 선바위와 연계된 무속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옛 문헌에는 조선 태조 때 한양 천도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한양 도성을 쌓을 때 선바위를 무학대사는 도성 안에 포함하자고 하고, 정도전은 성 밖에 두자고
하였다, 이때 정도전이 말하기를 "선바위를 도성 안에 들이면 불교가 성하고 밖에 두면 유교가 흥할 것이라 하니
태조가 정도전의 의견을 따르도록 하였다, 이에 무학이 탄식하며 "이제부터 승도들은 선비들의 책 보따리나 지고
따라다닐 것이다." 라고 하였다는데, 이런 것으로 보아 조선초기부터 이 선바위가 인왕산의 특징적인 암벽으로
시선을 끌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오늘은 흐미한 기억속의 발길따라 걸어본 인왕산(仁王山) 산행을 선바위에서 마무리하고 무속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였던 옛 무학동 마을길을 따라 내려오며 바라보니..옛 모습들은 별로 남아 있지 않고 고층 아파트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하긴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였는데..반세기의 세월이 흘러갔으니 무엇인들 예전처럼

그대로 남아 있겠는가..다행하게도 기이한 바위들의 모습은 별로 변하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서

조금은 위안을 받으며 집으로 향하였다.

 

2020/03/08 - 휘뚜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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