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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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역에서/ 박경하 (클릭하여 듣기)
그림은 직접 그린 화가를 통해서 설명을 들으면 보이지 않는 것도 보이게 된다.
시 또한 작가에게 직접 듣게 되면 어떻게 될까?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단어까지 보이게 된다.
이 시에 대한 해설은 작가의 산문집 <길귀신의 노래>에 아주 자세히 실려 있다.
스무 살의 겨울에 처음 쓰이기 시작해 스물한 살의 가을에 '사평역에서'라는 제목을 얻었으며
스물여덟 살의 겨울에 신춘문예에 당선된 작품이 바로 <사평역에서>라는 시(詩)이다.
당시 시(詩)의 인기가 얼마나 있었는지는 작가가 소개한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어서 소개한다.
소설가 김훈 작가가 문화부 기자시절 <사평역에서>를 취재하기 위해서 화순의 사평에 들렀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묻고 나서야 <사평역>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작가에게 전화하기를
"사평에 갔더니 역은 없고 빈 들판에 눈발만 날리더구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어..
역이 없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거든.. 그런데 역이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점점 더 좋아지더구먼..
바바리코트에 넣어 간 막걸리 두 병 혼자 마시고 돌아왔지.."
그렇게 돌아온 김훈 작가가 답사기에 쓴 첫 문장은
'사평은 어디에도 없고 우리들 마음 어디에도 있다' 였다.
- 길귀신의 노래, 94쪽
70년대의 암울한 시대는 흐르고 흘러 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기다리는 막차는 오지 않고 있는 현실은 그대로 존재한다.
그렇다고 침울해 할 이유 또한 없다.
사평역은 지금도 따뜻한 세상을 꿈꾸는 가난한 마음을 가진 누구에게나 존재하니까...(2021/08/09 복원함)
2016/12/30 -휘뚜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