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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산행기

옛길을 따라 문경의 토끼비리길과 고모산성을 다녀오다. |

by 휘뚜루50 2019. 9. 6.
 

▒ 옛길을 따라 문경의 토끼비리길과 고모산성을 다녀오다.
- 2010/08/21 -

 

▲ 대야산 전경
 
팔월의 불볕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토요일(8/21)날.. 오랫만에 백두대간 속리산국립공원권에 있는
대야산으로 산행을 하기로 했다. 삼복때보다 더 발악을 하는 찜통 날씨에 일반등산객들은 급경사
바위들로만 형성되어 있는 대야산을 등산한다는 것은 넌센스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 대야산 용추계곡
 
그러나 그런 판단은 대야산을 제대로 알고 있지 않은 무지의 판단이다. 왜냐하면, 대야산은 두개의 선유동
계곡과 용추계곡을 거느리고 있을 만큼 계곡이 잘 발달된 곳이므로 여름산행지로는 일등급에 속하는 곳이다.
그러니까 동쪽으로는 문경 선유동계곡과 용추계곡이.. 서쪽으로는 괴산 선유동계곡이 있으므로..^(^
 
 

▲ 괴산 선유동계곡
 
사실 오늘처럼 폭염이 인정사정없이 작열하는 날에 산행을, 그것도 그늘이 별로없는 암벽의
큰 산을 산행한다는 것은 무모함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최소한 5~6시간 이상 산행중에
2~3시간은 땡볕산행을 하다보면 십중팔구는 열사병에 걸리기 쉽고 약간이라도
건강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사망사고을 일으킬수도 있다.
 
 

▲ 문경 선유동계곡
 
그러므로 초보자들은 절대로 산행을 자제해야하고, 전문가라 하더라도 폭염산행의 기본지식을 철저하게
이행하며 산행을 해야 한다. 그렇게 악조건속에 인고의 산행을 마무리하고 난 뒤의 짜릿한 통쾌함(?)은
일상에서는 도저히 맛 볼 수없는 것들이다. 아마도 이열치열(以熱治熱)의 최고의 별미(?)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큼큼~
 
 

 
 
하여.. 우리들은 오랫만에 중부내부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문경 IC를 빠져나왔다. 여기서 대야산까지는
약 30분 정도 소요됨으로 문경 IC부근에 있는 고모산성과 영남대로의 옛길 토끼비리길을
즐감하고 가기로 만장일치로 합의하였다.
 
 

 
 
고모산성 역시 이글거리며 불타오르는 찜통 더위에 길게 눕어 있는 형상이다. 아직 복원사업이 진행중인
고모산성은 일명 할매산성, 할미산성으로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오정산 줄기의 고모산(姑母山)에 있는
포곡식 산성이다. 출토 유물로 보아 신라시대(470년경)에 처음 축조한 것으로 짐작되며, 이후 여러
차례 증축과 개축을 반복하였으며.. [경북팔경] 중의 하나인 진남교반(鎭南橋畔)을 사이에 두고
어룡산(魚龍山)과 마주보고 있는 천연 요새이기도 하다.
 
 

 
 
서쪽과 남쪽은 윤강이 감싸고 있고 동쪽에는 오정산(810m)에서 뻗어내린 험한 산등성이가 있고, 따라서
서쪽은 절벽을 그대로 이용하여 바깥쪽만 쌓는 편축식(片築式)으로, 나머지 삼면은 지세에 따라 성벽 안팎을
쌓는 협축식(夾築式)으로 성벽을 쌓았다고 한다. 성의 규모는 길이 약 1.6㎞, 성벽높이 2~5m, 너비 4~7m
정도이며 옛 성벽은 현재 대부분 허물어지고 남문지와 북문지, 동쪽 성벽의 일부분만 남아 있다.
 
그리고 고모산성은 삼국시대 초기인 2세기경 신라에서 계림영로를 개설하던 시기에 북으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것이며 산성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주흘산 이남이 한 눈에 보이며 남쪽으로는 불정지역 외의
다른 곳으로 길을 만들 수 없어 반드시 이 곳을 통과해야 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임징왜란, 동학농민운동,
운강 이강년선생의 의병항쟁시, 그리고 6,25전쟁시 전략적 요충지로써 많이 이용되었다.
 
 

 
 
고모산성에서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진남교반의 전경이다. 진남교반은 경북팔경 중 제1경으로 손 꼽히는
명소로 기암괴석과 깎아지른 듯한 층암절벽이 이어지고 강 위로 철교·구교·신교 등 3개의 교량이 나란히
놓여 있어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이룬다. 숲이 울창하고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이 절경을 이루어 문경의
소금강으로 불리며 진남휴게소 폭포 왼쪽 암벽 위에는 경북팔경지일(慶北八景之一)이라 새겨진
돌비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이 일대는 낙동강 지류인 가은천과 조령천이 영강에 합류하였다가 돌아나가는 지점으로,
아름드리 노송이 우거진 숲 앞으로 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지고 주차장·휴게소·인공폭포등이
마련되어 있어 여름철 휴양지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아직 복원사업이 한창 진행중인 고모산성의서편의 모습이다.

 
 

 
 
고모산성 안에 있는 나무숲속에는 작은 돌탑이 하나있다. 분명 무슨 사연의 연유가 있을텐데, 알 길이 없다.

 

 
 
고모산성에서 바라 본 오정산의 전경이다.

 

 
 
고모산성 안의 일부 전경이다.
 
 

 
 
고모산성과 [석현성]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석현성]은 임진왜란 때 문경새재 3개의 성이 바로 뚫리는 비극을 교훈 삼아
외적을 사전에 막기 위해 일자형 성을 쌓았다.
 
 

 
 
고모산성 앞쪽에 있는 석현성의 진남문(鎭南門)이다. 진남문(鎭南門)의 뜻은
[남쪽을 진압한다]는 뜻인데, 그러나 축성 이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진남문에서 바라 본 석현성과 고모산성
 
 

 
 
진남문을 나와서 옛길 토끼비리길로 가는 길..
 
 

 
 
영남대로 옛길 안내 표시판.. 몇년부터 불기 시작한 옛길 걷기 때문인지 토끼비리길은 잘 정리되어 있었다.
문경의 토끼비리 길은 부산 동래에서 서울까지의 360km에 이르는 영남대로 중에 가장 험한 길로
[영남대로]를 쓴 고려대 최영준 명예교수에 의해 1980년대에 재발견되기까지
역사의 뒤안길에 내버려져 있었던 길이다.
 
 

 
 
최 교수는 토끼비리를 발견하고 [이 길에 한국의 모든 옛길 역사가 녹아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길이는 길지 않지만 길이 보여줄 수 있는 역사,축대공법,사연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길은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 31호로 지정될 정도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길이다.
 
 

 
 
문경새재와는 15㎞ 거리에 있는 문경의 토끼비리는 이름도 사연만큼이나 많다. 토끼길이라해서
토천(兎遷)이라 불린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과 전투를 벌이며 남하하다 이곳에 이르렀다. 절벽과 낭떠러지에 길이 막혀
여기저기를 헤매고 있었다. 그때 마침 토끼 한 마리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는 걸 보고 쫓아가보니
길을 낼 만한 곳이 보였다. 토끼가 지나간 길을따라 벼랑을 잘라 길을 냈다.]라고..
 
 

 
 
그리고 토끼비리길이란 이름의 유래는 토끼가 지나간 길, 즉 토끼길이며 그것을 한자로 토천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비리]는 [벼루]의 문경 방언으로서 강이나 바닷가의 위험한 낭떠러지를 말하며,
벼랑의 개념과 비슷하게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절벽과도 같은 산허리를 따라 굽이굽이
이어진 길이 토끼비리길이다.
 
이 길은 관갑천잔도, 곶갑천잔도, 토잔 등으로도 불렸다. 잔도(棧道)는 험한 벼랑에 나무를 선반처럼
내매어 만든 나무사다리길을 말하며, 천도는 하천변의 절벽을 내고 만든 벼랑길을 뜻한다.
용어로 볼 때 강가의 벼랑을 이루는 절벽을 깎아낸 길과 나무 등을 이용해서 만든 길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말 조선 초 명문장가였던 권근의 기문(記文)에도 관갑천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관갑(串岬)이 가장 험하여 벼랑에 의지해서 사다리길을 만들었고, 관갑천(串岬遷)은 용연(龍淵)의 동쪽
언덕이며 토천이라고도 한다. 경상도는 남쪽에서 가장 크며, 서울에서 경상도로 가려면 반드시 큰 재를
넘는다. 그 재를 넘어서 약 100리 길은 모두 큰 산 사이를 가야 한다.여러 골짜기의 물이 모여 내를
이루어 곶갑(관갑·串岬)에 이르러 비로소 커진다. 이 곶갑(관갑)이 가장 험한 곳이어서 낭떠러지를
따라 사다리로 길을 열어서 사람과 말들이 겨우 통행한다. 위에는 험한 절벽이 둘러 있고, 아래는
깊은 시내가 있어 길이 좁고 위험하여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떨고 무서워한다. 몇리를 나아간
뒤에야 평탄한 길이 되어 그 내를 건넌다. 그것이 견탄(犬灘)이다. 견탄은 호계현의 북쪽에
있는데, 나라에서 제일가는 요충이요, 경상도에서 가장 험한 곳이다.]
 
여기에서 관갑은 경사가 급하고 험한 산허리를 뜻하며, 관갑천은 산허리에 난 길을 뜻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용연은 관갑 바로 밑에 흐르는 영강을 가리킨다. 토잔은 토끼비리와 잔도의 합성어로 볼 수 있다.
 
 

 
 
영남대로상에 주요 천도는 충주 남쪽의 달천 좌안,문경새재 제2관문인 조곡관 아래의 용추 부근,
밀양의 작천, 양산의 황산천 등에 있었으나 지금은 문경의 토끼비리와 밀양의 작천잔도 등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 나머지는 사라지고 없다.
 
관갑천잔도는 영강 수면으로부터 10~20m 위의 석회암 절벽을 깎아서 만들었다. 총연장 2㎞를 조금 넘는
이 잔도는 세 가지 공법을 이용해 건설했다. 1구간은 급한 암벽을 깎아내어 그 토석을 다져 평탄하게
만들었으며, 토석의 유실을 방지하기위해 약 3m 높이의 축대를 쌓았다.
 
 

 
 
2구간은 벼랑이 가장 가파른 곳으로, 석회암과 역암을 절단한 흔적이 뚜렷하게 보인다. 잔도의 폭이
급히 좁아지는 지점에는 축대를 쌓아 길폭을 넓히거나 길 가장자리에 말뚝을 박고 그 위에 나무로
만든 난간을 설치해 길을 넓혔음을 입증하는 흔적들이 많이 발견된다.
 
3구간은 산줄기가 뻗어 내려와 고갯마루를 이루는 부분으로 석회암맥이 돌출한 부분으로
인공으로 암석 안부를 만들었다. 이 안부는 영남대로상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고 권근의 기문에 기록돼 있다.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 반들반들해진 토끼비리길.. 길 폭은 불과 50㎝도 채 안 된다.
그러나 인간이 바꾸었을까..? 홍수와 같은 자연의 순리로 변했을까..? 현재 그 길이는 절반으로 줄어 있다.
암벽을 깎아 만든 천도와 절벽에 나무사다리길을 놓은 잔도길은 그나마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사고 방지를 위해 문경시청과 옛길박물관에서 탐방로 형태의 나무데크를 덧대어 두었다.
운치와 사고 위험을 동시에 줄여놓은 셈이었다. 옛길인 전통 도로와 근대 도로의 부조화인지,
조화 내지 화해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나는 토끼비리 옛길을 걸으며 길에 대한 상념들이 문득 떠올랐다.
인간에게 걷는다는 것은 확실히 단순한 행위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듯했다. [나는 걷는다]를 쓴 베르나르
모리비에르는 [홀로 걸으며 생각을 하는 동안 근본적인 것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걷는다]고 했다.
걷는 것은 곧 생각하는 것이요, 곧 철학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루소도 [산보를 즐기는 동안에는 그날 중 가장 자유롭고 안전한 (나)라는 자아 속으로
되돌아가 나만을 위하여 즐길 수 있고, 빈틈없이 인간의 진실과 자연이 소망하는
그대로의 존재로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고 했다.
 
불세출의 시인 윤동주의 詩 [새로운 길]을 생각났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약 한 시간 정도 고모산성과 토끼비리길을 걸었는데, 모두 땀으로 흥건히 젖은 상태로 지처있었다.
특히 평소 건강이 좋지 않은 S님의 상태가 의심스러워 진남교반을 경유하여 원점 회귀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진남문으로 되돌아 왔다.
 
 

 
 
진남문에서 성황당 고개마루 중간에는 옛 주막집 두채를 문경군에서 복원중에 있었다.
주막집은 한양으로 과거시험 보러 가던 선비와 보부상들이 토끼비리를 넘어와
쉬어가던 쉼터로 옛날 분위기로 재현중인데, 왠지 을씨년스럽다.
 
 

 
 
돌고개 성황당은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곳이며, 오고가는 길손들의 쉼터 역활을 하는 곳으로 어느 곳에 가든
성황당에 얽힌 전설은 있기 마련이듯이, 이곳도 예외 없이 선비와 구렁이처녀의 전설이 전해 내려 오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여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은 사연을 가지고 있다.
 
 

 
 
[선비를 원망하며 자결한 처녀, 구렁이가 된 사연]
 
옛날 과거길에 오른 영남의 어느 고을의 선비가 이곳 초가집 주막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그 집에는 부녀가 살고 있었으며, 아버지는 그 선비의 인품이 범상치 않음을 알고 자기 딸을 맡아
달라고 간청했다. 선비는 며칠을 머물다가 과거길을 떠나며 급제한 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처녀는 매일 치성을 올리며 기다렸으나 선비는 끝내 오지 않았다.
선비는 당당히 급제했으나 그 약속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수년을 보냈다.
 
아버지마저 죽고 선비를 기다리다 지친 처녀는 선비를 원망하며 자결한 후 큰 구렁이로 변했다.
그 후 이곳을 지나는 행인들이 구렁이에게 자주 피해를 입는다는 소문이 사방으로 퍼졌다.
선비는 그제야 구렁이가 그 처녀의 원귀임을 알고,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제사를 올렸다.
천둥번개와 함께 구렁이가 나타나 눈물을 흘리며 사라진 뒤론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이 처녀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이곳에 성황당을 짓고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큼큼~
 
자고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남녀관계의 사랑의 배신은 변함이 없었나보다. 다만 그 경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안그래도 참을 수 없는 무더위에 짜증스러운 판이였는데, 옛날 이야기마저 무더위를 증폭시키고 있었다.
하여.. 서둘러서 우리들은 대야산 아래에 있는 시원한 청정수의 용추계곡만 생각하고 차를 출발하였다.

 

 
 
용추계곡으로 가는 길목의 완장리 삼거리에서 본 희양산(曦陽山)이다. 희양산(曦陽山)은 충청북도 괴산군과
경상북도 문경시에 걸쳐 있는 산이다. 높이는 해발 999m이며 동·서·남 3면이 화강암 암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돌산이다. 암봉들이 마치 열두판 꽃잎처럼 펼쳐져 있으며 그 중심에 봉암사가 있다.
 
봉암사는 성철스님을 비롯한 선(禪) 지식들이 1947년 이곳에서 결행한 [봉암사 결사]가 유명하다.
당시 성철, 청담, 자운, 월산, 혜암 등 고승들은 오직 [부처님 법(진리) 대로만 살아보자.]고 결의하고
세속을 떠나 직접 일하고 탁발을 하면서 수행 정진한 곳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봉암사는
평소에는 일반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나 석가탄신일 하루만 개방을 하고 있다.
 
 

 
 
아뿔사~! 용추계곡은 먼저 온 피서객들로 초만원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사실 5년전에 내가 다녀갈 때만해도
용추계곡으로 접근하는 도로가 모두 비포장길이라 전혀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던 숨어 있는 비경이였는데..
몇년전에 접근도로가 포장이 되어 일반인들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어서 이제는 동작빠른 사람들의
피서지가 되어 버렸다. 하여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곳을 빠져나와 불란치재을 넘고 저수리재을
넘어 수청바위골 최상류의 계곡물이 시작하는 지점에 여장을 풀었다.
 
 

 
 
어차피 S님의 건강상태로는 산행이 무리수이므로 장성봉의 청정계곡수가 시작하는 최상류 지점에 여장을
풀고 우리들만의 홀라당 산림욕을 즐겼다. 이곳은 해발 500m 지점의 계곡 숲속이며 등산로가 아니므로
일반인은 물론 등산객조차 을씬도 하지 않는 아주 은밀한 곳이므로 모두 걷추장스러운 옷가지들을
홀라당 벗어 던지고 우리들식 피서를 마음껏 즐겼다.
 
어떤 님은 타잔놀이로.. 어떤 님은 선녀놀이로..
또 어떤 님은 신선놀이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보내다가 땅거미가 질때쯤
아쉬움을 남겨두고 그곳을 떠나 서울로 무사히 돌아 왔다. 큼큼~
 
 

 
 
팔월의 폭염이 인정사정 없이 불타오르던 날에.. ^(^
 
 
 
 
 
2010/08/24 - 휘뚜루 -

Stay With Me / Lacy J. Dal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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